지난주의 내 스케줄을 보면, 거의 파티 퀸이다.
재택근무하는 5일 중 나흘! 골목에 크리스마스 장식에 불이 들어오는 저녁시간이 되면, 나는 파티에 갈 준비를 했다.
아니, 이 시국에 파티를 간다고?
크리스마스 연휴 시즌을 앞두고, 각 부서마다 파티를 열어서 함께 일한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UXA 역할 특성상 여러 부서와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초대장도 여러 개 받았다. 부서마다 파티 컨셉이나 준비한 이벤트가 다른데, 올해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파티가 랜선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파티 장소는 거실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이 들어오도록 조명을 켜고, 눈송이 무늬가 잔뜩 그려진 크리스마스 스웨터를 입는다. 작년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샀던 선물꾸러미 모양 귀걸이를 달고 나면 파티 준비 끝이다. 작업 책상이 있는 거실에서 노트북을 켜고 파티 장소에 입장했다.
분위기를 더 살리고 싶은 파티에서는 소품도 준비했다. 루돌프 머리띠, 산타 모자, 커다란 엘프 인형까지 준비해서 파티가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카메라를 켰다. 파티 장소에 이미 모여있는 사람들, 하나같이 설레는 표정이다. 매일 화상으로 보는 얼굴들인데도, 어쩐지 더 반갑다.
근데 랜선 연말 파티엔 뭐하지?
연말 파티에 뭐 별거 있나? 그냥 수다 떨고, 각자 거실에서 마시고 싶은 음료 한잔씩 들고 기분 내는 거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파티 초대 이메일을 열어봤다. 이메일을 읽어보니까, 이게 웬걸? 간결하게 컨셉이나 어떤 게임을 할 건지 안내하는 내용이 친절하게 쓰여있었다.
‘이 사람들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편이로구만!’
팀마다 다르지만, 비슷한 패턴이 있었다.
초반: 한 해동안 성취한 것들 축하하기
중반: 게임이나 퀴즈 풀기
후반: 먹고 마시면서 자유롭게 수다 떨기
파티 초반은 교장선생님이 아침 조회하는 것처럼 뻣뻣하고 형식적인 자리가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신선한 구성을 시도한 팀이 많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방법은 구글 슬라이드로 템플릿을 공유하고, 각자 성취한 것을 팀원들이 직접 적고 발표하는 방법이었다. 업무 관련된 성취 내용도 좋고, 개인적으로 도전하고 이뤄낸 일을 적어도 됐다. 매일 데드라인이나 런칭 타이밍만 생각하면서 일을 하다가, 무엇을 해냈는지 생각하는 기회가 생기니까 좋았다.
기술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인트로는, 유니티(Unity)를 사용해서 가상의 파티룸을 만들고 참여자 전원이 파티 장소를 방향키로 조작해서 돌아다니며 각 팀의 프레젠테이션 비디오를 보는 방법이었다. 화상으로 만나서 대화하는 파티에 질릴 때쯤이었는데, 3D로 구현된 전시장을 보고 창의력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파티 후반은 ‘막판’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자유로운 대화가 오가는 수다 떨기 판이다. 랜선으로 진행하는 파티는 오프라인보다 눈도 귀도 피곤하다보니, 초중반에서 이미 체력이 (그리고 정신력?) 다한 사람은 막판까지 버티지 못하고 파티를 마무리한다. 파티퀸이라고 앞서 소개했지만, 사실 체력이 (그리고 영어력도!) 딸려서 대부분 막판에는 끼지 못했다.
초반과 후반은 어쩐지 오프라인으로 파티하던 때와 비슷했다. 소통 방식이 화상 채팅과 가상현실로 바뀌었을 뿐, 예상 가능한 이벤트랄까? 하지만, 파티의 중반에 대해서 조금 더 소개를 해봐야겠다. 매일 저녁 이어졌던 게임과 퀴즈들이, 랜선이어서 더 재미던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1. 펍 퀴즈 = 지루하다?
미드나 영드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종이랑 연필을 쥐고 빙고나 퀴즈 진행자의 진행에 맞춰서 열심히 문제 푸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지? 영국에서는 동네 펍에서 퀴즈 대회를 여는 게 흔하다. 퀴즈 내용은 주최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주로 상식이나 문화 관련 문제들이 많다.
대학교 때 깜짝 퀴즈, 중간고사 퀴즈, 이런 퀴즈는 수도 없이 풀었는데, 굳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즐거운 자리에서까지 퀴즈를 풀고 채점을 해야겠냐고!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퀴즈 대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대 이변이 일어났다, 일부 종목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상위권에 들어간 것이다! 영국에서 6년간 상식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건가? 아니다. 퀴즈 종목들이 기상천외했기 때문이다.
상위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종목들:
초콜릿 바 단면 보고 어떤 브랜드, 상품명인지 맞추기
특이한 가전제품 사진 보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추측해보기
음식 사진 보고, 몇 시간 동안 달려야 칼로리를 소모할 수 있는지 계산해보기
초콜릿을 입에 달고 사는 나에게 첫 번째 종목은 거의 홈그라운드였다. 두 번째 종목은 게임의 규칙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았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추측한 후에, 틀린 답을 말해야만 점수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규칙 자체가 웃겼다. 틀려야 맞는 문제라니! 문제를 푸는 내내 사람들이 너무 웃긴 코멘트를 많이 해서 진행자가 경고를 줄 정도였다.
마지막 종목은 아슬아슬했다. 참가자 중에서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칼로리 계산을 척척 해낼 것 같았다. 그런데, 운이 좋았다. 음식 사진 중에서 평소에 자주 먹는 과자와 초콜릿이 많이 나왔다. 문제를 푸는 도중에 ‘과자 끊은 지가 언젠데!’ 불평하는 건강한 식습관의 소유자들에게 미소를 감추느라 애 먹었다.
2. 화상채팅으로 단체사진 찍기
재택근무하면서 지겹게 보던 화상채팅 화면이 단체사진을 찍는 장소가 될 수 있다면 어떨까? 화상채팅을 갤러리 뷰로 설정하고, 스크린샷을 찍으면 간단하게 단체사진을 찍을 수 있다. 300명 넘는 부서 사람들과 이렇게 단체사진 찍는 방법으로 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이 게임만큼은 모두 재택근무하는 중이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방법은 무척 간단했다.
우선 10명씩 팀을 정한다.
게임 진행자가 부서 전체 사람들에게 주제를 발표한다. 한 주제당 제한시간은 10분!
팀 별로 Breakout 채팅창에 입장해서 스크린샷을 찍는다.
스크린샷을 게임 진행자에게 채팅으로 공유한다.
게임 진행자가 각 팀에서 전달한 스크린샷을 슬라이드에 입력하면 1라운드가 끝난다.
가장 창의적으로 주제를 표현하는 팀에게 점수가 주어지기 때문에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서 소품과 의상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모두들 집에 있으니까, 원하는 대로 마구마구 소품을 가져와서 주제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분장용 가발, 마술사 모자, 거대한 선인장... 평소에 딱딱한 홈오피스처럼 보였던 동료들의 카메라 프레임 안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물건들이 보이니까 웃음이 자꾸 나왔다.
몇 라운드나 지났을까, 깔깔거리면서 웃다가 주변을 둘러봤더니 옷이며 장난감들이 잔뜩 어질러져있었다. 지긋지긋한 미팅 장소라고만 생각했던 화상채팅으로 정신없이 노는 공간도 될 수 있다니, 정말 재미있었다.
3. 질문에 5가지만 말해봐, “These are 5 things!”
앞에서 소개한 게임들은 진행자도 필요하고, 미리 퀴즈 준비도 해야 하고, 준비할 것이 많다. 큰 규모의 파티에서 진행한 게임이라서, 몇 주 전부터 파티 기획자들을 모집하고 준비했기 때문에 진행이 매끄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10명도 안 되는 작은 파티에서는 가볍게 술자리 게임처럼 할 수 있는 게임이 필요하다.
코미디 연기 수업을 듣는 직장 동료가 소개해 준 게임의 이름은 5 things. 문자 그대로 5가지 대답을 하면 되는 게임이다. 규칙은 MT 술자리 게임 중에서 지하철역 이름을 대는 게임하고 꽤 비슷했다.
5 Things 게임 방법:
한 사람이 대답할 사람을 지목하고, 5가지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지목당한 사람이 5가지 대답을 끝내면, 나머지 사람들이 “These are 5 things!”라고 두 번 외치면서 율동 같은(?) 것을 한다.
대답을 마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지목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단순해도 너무 단순한 이 게임의 진짜 웃음 포인트는, 창의적인 대답 (또는 질문)에 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내년에 가고 싶은 곳 5곳을 말해줘!’라고 물어봤을 때, 단순하게 ‘디즈니랜드!’라고 답할 수도 있지만 ‘디즈니랜드! 단, 어린이 손님 입장 금지하는 이벤트 하는 날에 가는 걸로’라고 대답해도 된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마구 대답하다 보면 진짜 밑도 끝도 없는 답들이 오간다.
내가 받은 질문은 '바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최악의 일' 5가지를 대는 것이었다. 시간 끌지 말고 바로 이어서 대답을 하려니까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말했더니, 한 가지 대답밖에 기억이 안 난다. '고래가 새끼 대신에 알을 낳는 일!' 마지막 대답을 외쳤을 때, 다들 빵 터졌는데 평소에 환경 운동에 관심이 많은 팀원 한 명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한 번 또 터졌다.
올해 연말 풍경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밤늦은 시간까지 신나게 떠들고 돌아다니는 크리스마스 직전의 흥겨운 분위기를 기대했지만... 영국에서 코로나 19 감염 속도가 너무 빨라지는 바람에 올해 연말은 조용히 지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회사에서 준비한 크고 작은 랜선 연말 파티에 다녀오면서, 새로운 방법으로 연말을 즐기는 방법을 알게 됐다.
한국 또는 다른 나라에서 올해 연말의 달라진 풍경 때문에 우울해하고 있는 분들에게 위에서 소개한 랜선 연말 파티 아이디어들이 조금이나마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오프라인에서 같은 공간에서 먹고 마시며 떠들 수는 없지만, 만나고 싶은 이들과 랜선으로 만나서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힘들었던 2020년의 일들을 조금이나마 털어낼 수 있을까?
치열하게 생존해온 과정을 칭찬하고 격려할 새도 없이 지나가버린 올해. 우리 모두 정말 기를 쓰고 2020년을 버텨냈다. 1년 동안 고생 많았다고 자기 자신에게, 또는 함께 고생한 이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소중한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해. 연말을 흥겹게 마무리하는 기회를 부디, 코로나 19로부터 지켜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