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스하게 일어나는 평일 오전 6시.
영국에서 겨울 해가 뜨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은 시간이다. 재택근무를 하는 중이어서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출근길에 오르던 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려고 하는 이유는, 혼자서 조용하게 글을 쓰는 연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둑어둑한 이른 아침에 주방으로 내려와서 식탁에 노트북을 올려놓는다. 손가락 운동을 하면서 글쓰기 모드에 들어가 보려는데, 잠에서 덜 깬 머리가 영 돌아가지를 않는다.
이럴 땐, 커피를 한잔 딱~! 마셔줘야한다. 자신 있게 주방의 홈카페를 열어보려고 했더니 손이 멈칫한다.
가만있자...커피를 내릴까, 끓일까?
커피를 어떻게 마실지 고민을 하게 된 것은 11월에 한국에 다녀온 이후에 시작됐다.
청순한 한 모금, 드립 커피를 내려볼까?
잠깐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엄마도 친구들도, 모두 드립 커피의 세계로 나를 초대했다.
진하고 걸쭉하게 우유와 섞어마시는 커피만 마셨던 나에게 드립 커피는 새로웠다. 겉으로 보기엔 아메리카노랑 비슷한데 한 모금 마셔보면, 아메리카노에서 느껴지던 시큼 텁텁한 맛이 전혀 나지 않는다. 은은한 커피 향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듯한 김이 코에 닿는 게 기분 좋았다.
드립 커피를 집에서 내리는 방법은 엄청 간단했다.
거름종이로 만들어진 커피백을 머그잔에 걸쳐두고,
적당히 갈린 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졸졸 커피백에 붓는다.
한 가지 매력적인 것은, 뜨거운 물을 성질 급하게 부으면 맛있는 커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잠 깨라고 모닝커피를 끓여주던 엄마는, 커피콩들이 보글거리면서 거품을 뿜어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을 조금씩 부었다. 맨 처음 물을 부었을 때는 향기가 별로 나지 않았는데, 두 번째부터는 커피가 숨을 쉬는 것처럼 향기가 금세 주변으로 퍼졌다.
커피를 내려주는 사람도, 마시는 사람도, 어쩐지 여유를 가지고 드립 커피의 청순함을 닮아가는 것 같았다. 런던 밤비에게도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런던에 돌아올 때 커피백을 몽땅 들고 왔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거품, 라테를 끓여볼까?
청순한 드립 커피를 아침마다 즐기는 것도 좋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배가 많이 고픈 날에는 맑은 커피가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질 못한다. 이런 날에는 우유가 잔뜩 들어간 라테를 끓이고 싶다.
장비 빨(?) 덕분에, 라테를 끓이는 방법도 드립 커피만큼이나 간단하다.
네스프레소 머신에 캡슐을 쏙 넣고, 에스프레소 버튼을 꾹 누른다.
졸졸거리며 나오는 커피에 원하는 만큼 우유를 붓는다.
전자레인지에 1분을 돌리면, 얇은 우유 거품이 올라온 라테 완성이다.
장비빨이라고 했지만, 지금 사용하는 네스프레소 머신은 2년 만에야 빛을 봤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런던 밤비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고민하다가 커피 머신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밤비도 나도, 캡슐 커피의 매력을 잘 모르던 터라 머신을 주방 한쪽에 방치해두고 말았다. 먼지만 쌓였던 굴욕적인 날을 보내던 머신은 알았을까? 꼼짝없이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자기가 오아시스 같은 존재로 대접받을 거라는 걸.
2020년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우리는 네스프레소 캡슐을 종류별로 주문했다. 올해는 연말에 에프터눈 티를 먹으러 갈 수도 없고, 친구들과 파티를 할 수도 없고, 유럽의 다른 도시로 훌쩍 떠날 수도 없다. 대신 집에서 소소하게 커피라도 마음대로 골라마실 생각으로 다양한 캡슐을 샀다.
판데믹 때문에 지구가 떠들썩한 1년. 건강하고 무사히 보냈을 뿐만 아니라, 따듯한 커피를 마시는 여유를 부릴 수 있으니 참 다행이다.
따듯한 라테를 한 잔씩 손에 쥐고 런던 밤비랑 사이좋게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다가 문득 창 밖을 보니까, 드립 커피도 라테도 한 모금 못 마셨는데 벌써 해가 뜨고 있었다. 한 글자도 못 적은 채로 아침을 보내기가 아쉬워서 커피 없이 부랴부랴 이 글을 썼다.
내리고 끓이는 게 꼭 글쓰기 같다
한동안 글을 올리는 것이 어려웠다.
브런치 북 [런던과 나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를 발행한 후에, 지난 한 달 동안 한국에서 가족과 보낸 시간이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브런치에 글을 발행할 수가 없었다. 손이 굳을까 봐, 계속 종이에 뭔가 끄적거리기는 했다.
시간에 흐름에 따라서 기억을 기록하는 일기 같은 글. 드립 커피처럼 중력을 따라 주르륵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글을 썼다. 그런데 브런치에 옮겨서 발행하려고 다시 읽어보면 기억이 너무 청순해서, 나만을 위해 쓴 글 같았다.
드립 커피가 때로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것처럼, 한 달 동안 휴가를 다녀온 내 기억들도 지나치게 가벼운가 보다. 머신에서 짜낸 진득한 에스프레소 같은 추억과, 우유처럼 부드럽고 뭉근하게 기억을 되돌아보면서 느낀 점들을 라테처럼 끓여내야 글이 될 것 같다.
이미 아침 해는 높이 떠버렸다. 출근하는 직장 동료들의 메일과 메신저 알림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면서 또 고민한다.
내일 아침엔, 드립 커피를 내릴까? 라테를 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