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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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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May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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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9 맑고 고운 하늘

일러스트 : 스투키 지키기 by 최집사



핸드폰, 가방, 이어 마이크. 반려인이 출근하기 전 혹 빠진 게 없나 복창하며 확인했다. 그리곤 잘 다녀오라고 하고 돌아서는데 다시 현관 키패드 누르는 소리가 났다. 슬리퍼를 신고 나간 그가 도로 돌아온 것이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폰 대신 리모컨을 들고 출근했다는 사연이 떠올랐다. 나중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마주 보며 복명복창하고 있겠구나 생각하니 그것도 귀여울 거 같아 웃음이 나왔다. 제발 그런 날이 무사히 왔으면 좋겠다.



 오늘은 수요일, 장을 보는 날이다. 정기적으로 주 1회 굵직한 장을 보지만, 추가로 필요한 건 마트 세일과 장날에 맞춰 더 구매한다. 어쩔 땐 일주일에 3번이고 4번이고 보기도 하지만 갈 때마다 예산에 맞춰 필요한 것들만 사려고 한다. 귀한 돈 주고 괜한 짐과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평소 잘 기억하고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생각한다.



건너 마을 장날이라 시장에 다녀올까 하다 땡볕에 돌아다니다 기력이 소진할 듯하여 동네 채소가게로 갔다. 어제오늘 가게 커뮤니티에 올라온 신선한 채소를 보고 충분히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도 이미 가게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매일 새벽 경매에서 물건을 때 오신다는 주인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장마 전 쟁여놓을 채소들을 다람쥐처럼 쓸어 담았다. 6월 초엔 장아찌를 담는 시기라던데… 지난번에 담은 가지와 버섯 장아찌에 이어 어제는 오이지를 만드는 법을 검색해 두었다. 성공하면 겨울 식량용 절임 채소를 몇 가지 담아볼까 하는데 그것도 김장처럼 한 번에 많은 양을 만드는 일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 같다.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조금씩 먹을 만큼만 만들어 두어야겠다. 그러니 오이는 다섯 개만…



 오후에는 사온 채소들을 식초물에 씻어 소분하는 작업을 했다. 갈수록 날이 더워져서 상해버리는 일 없도록 잘 다듬어 밀폐용기에 담아두었다. 직장 다닐 땐 식당에서 사 먹고, 시켜 먹고, 인스턴트 돌려먹던 습관이 아프고 난 뒤론 직접 요리하는 습관으로 바뀌었다. 다소 비효율적인 면도 있으나 이제야 비로소 스스로를 챙기는 마음이 든다. 지금의 요리가 중노동 삽질이 되지 않기 위해 조리법을 간단히 하고 기계와 도구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암자의 사찰 음식처럼 하루 세끼 오색나물 오 첩 반상을 차려먹진 못하지만, 체력과 시간을 고려해 단순하고 쉬운 방식으로 정성껏 식사를 준비해 먹고 있다.



  요즘은 날씨도 더할 나위 없고, 특별한 사건 사고 없이 무탈하게 지내고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불쑥불쑥 문득문득 불안한 마음이 든다. 인생의 태풍(유방암)에 쓴맛을 보고 나니 평화가 평화가 아닌 폭풍전야로 인식되는 경향이 생겼다. 한편으로 이것도 간사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어릴 적 만화 주제곡을 부르거나, 기합을 넣거나, 고양이들을 화장실 청소를 하며 번잡한 마음을 떨치려 한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지금을 사는 것만이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걸 몸소 받아들이고 실천하기까지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한 거 같다. 그러니 멀었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생각한다.



* 릴스로그 업로드되었습니다. ^^

https://www.instagram.com/reel/C7jLuaeP2ss/?igsh=MWYyeTNjZnVndGUxM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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