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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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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Jun 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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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7 비 오기 전 습습

일러스트 : 채소부자 냥박싱 by 최집사



 새벽 5시에 잠이 깼다. 보통 화장실에 가려고 이때쯤 한 번 깨는데 오늘처럼 잠들지 못하고 뒹굴거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어제 좋아하는 로스터리 카페에서 무리를 좀 했더니 반려인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깐씩 깰 때마다 스마트폰 불빛에 홀린 사람처럼 웹소설을 읽고 있는 그가 보였다. 책을 숙면 보조제로 쓰고 있는 나로서는 밤새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게 그저 신기했다. 한편으로 밤새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가 있다는 건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엔 냥이들 화장실 물청소를 해놓고 빨래를 돌렸다. 요즘 날이 더워지니 수건이 한 무더기가 나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평소 건조대 지분을 훨씬 웃돌았다. 오후엔 흐려진다고 하니 해가 들 때 바짝 말리려고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베란다에 나가니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겨터 파크가 개장을 알렸다. 수련하는 마음으로 구겨진 양말을 탁탁 털어 하나하나 널고 있는데 룽지가 심심하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나와서 구경을 했다. 도와줄 마음 따위는 없어 보이는 아이는 호기심에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다녔다. 털옷까지 입은 아이가 더울 거 같아 얼른 들어가라고 다그쳤지만, 내심 햇빛을 쬐는 화분을 공격할까 걱정도 되었다.



이것저것 할 일이 생각나 마음이 급해졌다. 그럼에도 작업을 미룰 수 없어 커피를 내리고 식탁에 앉았다. 매일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손이 굳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웬만하면 잠깐이라도 팬슬을 쥐고 선 하나라도 그으려고 한다. 세상엔 멋진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고, 그런 자극을 받을 때마다 왠지 모를 부끄러운 마음도 들지만, 결국 나답게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거북이처럼 달팽이처럼 나무늘보처럼… 시간을 황금처럼 여기며 살아가야지.



 주말에 만들 반찬거리를 생각해 간단히 장을 보고 왔다. 무슨 경륜 선수처럼 자전거를 몰고 다녀왔다. 숙주, 버섯, 막국수, 바나나. 수많을 채소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딱 필요한 것만 데려왔다. 신속히 귀환하면서 점심으론 된장찌개를 먹고, 저녁엔 상해버리기 전에 콩국을 해치워야겠다 생각했다. 오후가 되어 돌돌이와 청소기를 돌리고 화장실 청소도 했다. 막판엔 기력이 소진하여 쌍욕이 나올 뻔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를 따라 불렀다. 그렇게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뒤 물도 마시고 냉장고에 넣어둔 수박도 꺼내 먹었다. 황소개구리처럼 빵빵해진 배를 주체하지 못해 한동안 화장실에 들락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냥이들은 때맞춰 사냥을 촉구했고, 말없는 거실 소파가 오랜 친구처럼 의지가 되었다.



* 릴스로그 업로드되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reel/C76G2h9vI3c/?igsh=Z3Mwdng3b3lyMj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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