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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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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Jun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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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9 폭염

일러스트 : 풍경들 by 최집사



  아침에 일어나 쌀을 씻고 청소기를 돌렸다. 탈모 아니, 털갈이 중인 꾸리 덕에 요즘은 매일 청소를 하며 산다. 흑염소만 한 덩치를 어르고 달래 털을 빗기고 룽지와는 가볍게 공놀이도 했다. 급격히 기운을 소진한 나와 달리 녀석은 흥이 올라 온 거실을 날아다녔다. 꼭 무빙의 남자 주인공 같았다. 강아지처럼 보란 듯이 털공을 물어와 자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들끼리도 잘 놀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닥 친하지 않은 거 같다.



꾸리도 놀고 싶은데 자꾸만 룽지 눈치를 본다. 놀 때마다 룽지가 방해를 해서 어쩔 땐 작은방에 유배 보내기도 한다. 요즘같이 더워지면 쉬고 싶은 마음과 놀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는 모양이다. 맘 껏 뛰지 못했는데 자꾸 주저앉고 싶으니 욕구불만이 생긴 걸까… 그게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어제는 토를 했다. 근래엔 나도 잘 돌봐주지 못한 거 같아 마음이 쓰였다.



 좋은 사료, 비싼 장난감은 집사들을 위한 것인지 모른다. 실제로 냥이들은 끈 하나만 있어도 환장을 한다. 그동안 주문했던 아이들의 물건들이 사랑의 면죄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라봐주고 귀 기울이고 충분히 기다려주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랄까… 비싼 사료를 먹이지 못하고, 지금은 너덜너덜한 장난감들 뿐이지만 돈 들이지 않고 사랑을 주는 일도 결코 쉽지만은 않다.



조찬으로 씨앗이 콕콕 박힌 깜빠뉴에 예전에 만들어둔 토마토페스토와 버섯 장아찌를 올려 먹었다. 매일 먹는 오이와 당근을 넣은 샐러드도 함께 먹었다. 싱크대 옆 스탠딩바?에 기대어 라디오를 들으며 먹고 있는데 꾸리가 큰일을 보는 소리가 들렸다. 적나라게 모래를 파는 소리와 집사를 호출하는 소리. 엄청난 아이가 나왔구나 짐작이 되었다. 여름이라 냄새가 날까 웬만하면 바로바로 치우려 한다. 인간 비대가 되어 아이들 엉꼬도 닦아준다. 대가 없이, 바람 없이 생명을 돌보는 일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한낮이 되자 폭염 경보 메시지가 울렸다. 그럼에도 오늘은 장날이라 자전거를 꺼냈다. 모자와 팔토시로 완전 무장하고 신발장 앞에 쭈그려 바퀴에 바람을 넣었다. 삼두를 자극하는 동작에 룽지가 먼발치서 경계의 눈초리로 지켜봤다. 잘 익은 수박 한 덩이를 단돈 오천 원에 데려왔다. 아저씨는 작고 못생긴 게 달다고 했지만, 그 옆에 크고 배꼽이 없는 아이를 데려 왔다. 집에 와 잘라보니 속도 빨갛고 껍질도 얇은 게 딱 좋았다. 6천 원짜리 콩물도 한 통 사 왔다. 5일 전엔 5천 원이었는데 그새 콩값이 올랐다고 했다. 나와 반려인은 우뭇가사리 넣은 짜지 않은 콩물을 좋아한다. 설탕도 소금도 넣지 않는, 얼음 몇 알과 오이만 띄워 먹는 게 좋다.



 집으로 돌아와 점심으로 열무국수를 말아먹었다. 올여름 세 번째 열무김치다. 이번에는 특별히 어머님 텃밭에서 나온 열무라고 했다. 역시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아껴먹고 싶은데 날이 더우니 금방 시어 버린다. 여름이라는 계절은 아무리 더워도 지금을 즐기는 수밖에 없다고 알려주는 거 같다. 그러니 당분간 마음껏 실컷 질리도록 열무를 먹어야겠다.



* 릴스로그 업로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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