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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티끌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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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Jul 0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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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5 맑았다가 흐렸다가

일러스트 : 집사놀이.3 by 최집사


 


 아침에 일어나 지난밤 우려 놓은 녹차를 마시려고 보니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와있다. 뭐지 싶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반려인이 거름망을 씻고는 말끔히 헹구지 않은 거 같다. 괜히 말했다간 다툼으로 번질 거 같아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다시 물을 끓였다. 설거지할 때 꼼꼼히 헹궈달란 말을 어떻게 돌려 말할지 모르겠다. … 결국 말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얼마 전 에어컨 실외기 커버가 벗겨진 걸 보고 손보자고 했더니 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사람을 부르자고 했다. 인터넷에 알아보니 직접 하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당연히 사진을 찍고 치수를 재어 커버를 주문해 두었다. 출장비에 수리비에 요즘 같은 성수기엔 예약도 안 잡힐 거 같고 실제로 지난번 기사님은 꼼꼼히 봐주시지 않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마지못해 부르게 되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된다는 마음이었다.



결국 의견은 좁혀지지 않은 채 하고 싶은 사람인 내가 총대를 매기로 했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부정의 기운을 불어넣는 그에게 알았다고 직접 하겠다고 말하곤 내심 걱정도 되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일단 해보고 싶었다. 잘 되면 굳은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어야지 생각했다.



내심 마음이 좀 상했지만 그를 비난하고 싶진 않았다.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그의 선택이 차선이 될 테니까, 일리 있는 의견이라 생각했다. 요즘은 당연히 남자들도 장보고 요리하는 시대이니, 여자인 나도 못 박고 전구 갈고 기본적인 수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릴 적 아빠는 망가진 변기도 고치고 다리미도 고쳤다. 맥가이버와 만능 팔이 나오는 모자를 쓴 가제트 형사는 그 시절 내가 동경하던 히어로였다. 조립, 수리, diy에 진심인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돈을 쓰며 맡기는 번거로운 일(에어컨을 분해해 청소하거나 자동차 엔진 오일을 가는)을 누군가는 돈 버는 마음에 버금가는 만족과 보람을 느끼며 할 수 있는 것이다.



몇 년 전이었다면 이런 류의 대립은 분명 부부싸움의 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큰소리도 오가고 침묵시위도 하고 며칠 동안 투명인간 모드로 지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식으로 싸우지 않는다. 혹 싸우더라도 무의미한 소모전은 치르고 싶지 않다. 그럴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기 때문에.



 크게 아프고 나은 뒤 스스로 변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그 전의 몸과 마음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상대를 힘들게 하는 일은 어찌 보면 스스로를 힘들고 아프게 하는 일이다. 앞 일은 알 수 없고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흐른다는 걸 알고 나면 괜한 자존심이나 감정싸움은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냥이들 화장실 모래를 비워 씻어 놓고 일주일치 빨래를 돌렸다.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알람 맞춰 약도 챙겨 먹고, 화장실에 가 양치를 하는데 꾸리가 다가와 칫솔에 관심을 보였다. 이때다 싶어 입을 헹구고 고양이 칫솔을 꺼냈다. 나긋한 목소리로 유인한 뒤 사타구니 사이에 육중한 몸뚱이를 고정시켰다. 한 번만… 자, 한 번만…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애원했는지 모른다. 아이의 바둥거리는 힘은 노인과 바다를 연상시켰다. 불응할 시 병원에 가야 한다고 협박도 했다. 무한 칭찬과 애걸복걸로 단시간에 양치를 끝낼 수 있었던 건 내가 했던 모든 말을 다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한다.



그렇게 고양이 두 마리 양치를 끝내고 나니 세탁기 알람이 울렸다. 베란다에 나가 햇살 마세를 받으며 빨래까지 널고 나니 모공에서 땀이 샘처럼 솟았다. 요즘은 정말이지 인중이 마를 날이 없다. 냉장고로 돌아와 참외와 천도복숭아를 꺼냈다. 아이스커피도 연하게 한 잔 만들었다. 그제야 창문 너머로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잠깐의 낭만을 잊지않고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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