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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티끌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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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Jul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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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8 흐리고 꿉꿉

일러스트 : 선물가게 by 최집사



 주말 아침 모처럼 외출할 생각에 일찍 눈이 떠졌다. 곧장 도서관에 가 반납할 책을 재대출하고 다시 한번 완독 의지를 다졌다. 그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밀양의 한적한 카페로 향했다. 커피 대신 말차 라테를 시키고 창밖을 보는데 거대한 암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곳엔 클라이밍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덥고 습한 날씨와 모기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줄하나에 몸을 의지 한 채 두려움에 맞서며 엉금엉금 절벽을 오르는 모습을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았다. 뭔가 이해할 수 없지만 멋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역시 나답게 만드는 일은 타인의 이해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려인이 친구들과 골프를 치러 간 사이, 집안일을 하고 장을 보고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밥을 안치고 예능을 좀 보다가 에어컨 실외기 파이프 커버를 새로 씌우는 작업을 했다. 창밖으로 손을 뻗어 조심조심 조금씩 파이프 커버를 벗겼다. 그동안의 풍화와 침식작용, 연이은 둘기들의 공격으로 처참해진 커버는 작은 손짓에도 발바닥 각질처럼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뱀 허물처럼 그것들을 한 올 한 올 벗겨내며 묘한 희열을 느꼈다면 좀 변태 같은가… 그렇게 심도 있는? 작업에 빠져들 때 쯤 반려인이 돌아와 합류를 했다. 그는 전선을 정리하고 나는 새 커버를 재단하며 역할을 분담했고, 커버를 씌울 때는 함께 호흡을 맞춰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가족이란 걸 잊고 남 대하듯 깍듯해져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면 안 되고 심기를 건드리는 언행을 삼가야 한다. 되로록이면 극존칭을 쓰는 게 좋다. 자칫 조그만 의견 대립에도 부부싸움으로 점화된다는 건 그동안의 유의미한 경험으로 학습했다. 같은 맥락으로 부부끼리 등산을 가거나 캠핑을 한다는 건 수도자급 내적 성숙이 필요한 일이다 생각한다. 힘든 일은 생각보다 공평하게 나눠지지 않고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누구에게도 강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지난 주말부터 거실에 나와 취침을 하고 있다. 안방보다 넓고 시원해 한창 더울때 기절한 척 바닥에 누우면 극락을 맛볼 수 있다. 자연히 올여름은 여기서 보낼 계획이다. 냥이들은 자신들의 놀이터를 침범한 집사가 야속한지 수시로 발가락을 물고 도망갔다. 반려인은 내가 밤에 냥이들에게 욕을 했다고 하지만 이번에도 기억에 없다. 내가…? 정말…? 역시 불리한 언행은 자체적으로 노이징 되는 능력이 있는 거 같다. 그래도 양심에 찔렸는지 몰래 사과는 했지만 그들도 지난밤 일을 기억 못 하는 눈치였다. 역시 그럼에도 심해처럼 어둡고 조용한 거실에 두 집사와 고양이들이 제각기 바다사자 자세로 널브러져 있으면 평화로운 마음이 든다. 물론 2시간에 한 번 꼴로 깨어 화장실도 가고 냥이들에게 소리도 지르지만 그것도 이 모든 평화의 일부라 생각이 든다.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걸 아는지 룽지의 알람 소리가 평소보다 날카롭다. 그런 아이를 꾸리는 상대 해 주지 않고 시종일관 성질을 낸다. 밥을 먹을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화장실 정리를 하고 나와서도 장화 신은 고양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어 하는 수 없이 안아 올려 눈을 맞췄다. 마침 라디오에서 샤이니 노래가 나왔고 잠시 댄스 타임을 가져야 했다. 꿉꿉한 장마철에 뽀송뽀송한 고양이를 안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져 춤을 안 출 수가 없었다. 마음이 통했는지 룽지도 제 꼬리로 색소폰을 불며 골골송을 불러주었다. 한 겨울의 난로 같고, 초봄의 민들레 같고, 장마철 제습기 같은 녀석이다. 문득 이것이 내 복의 최상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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