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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티끌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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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Jul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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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9 폭우와 홍수

일러스트 : 로망키친 by 최집사



아침을 먹는데 날파리와 마주쳤다. 참외, 복숭아, 피클, 장아찌, 바나나 껍질…. 그는 내 쪽에서 초대장을 보낸 것이라고 했다. 투항할 마음이 없는 날파리를 끝내 설득하지 못하고 싱크대 지하 세계로 보내버렸다.  섣불리 수도를 틀어 흘려보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통성명이라도 해둘걸 그랬나…



매일 같은 장소에서 발견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긴히 전할 메시지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충분히 일리 있는 상상을 엮어가던 중, 저 세상으로 떠났던 날파기라 환생해 주변을 얼쩡거렸다. 불사신일까… 기억을 더듬어보니 수채구멍 속에서 엄지를 치켜들며 “I will be back”이라고 했던 거 같다.



그는 미래에서 온 나라고 했다. 그곳의 나는 유병장수하여 200세까지 산다고 했다. 실제로 평균 수명은 300세로 그 나이 정도면 중장년층으로 분류된다고. 200번째 생일을 맞아 날파리 수십 마리로 변하는 슈트를 입고 여러 시간대의 과거를 여행할 수 있는 이벤트에 당첨되었다고 한다. 일정이 빠듯한 관계로 긴 얘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그곳의 나는 제법 꼬짱꼬장 한 모습이라고 했다. 다음 행선지는 중2병에 걸린 나라고 했는데, 감당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아무쪼록 건투를 빌며, 떠나는 뒷모습을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 로또 번호 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어김없이 헛소리가 나오는 시간이다. 주방 여기저기 초를 켜놓고 빨래를 돌렸다. 영화 파묘 버금가는 분위기에 섬뜩해진 마음을 다독이려 지브리 음악도 틀었다. 마녀 배달부 키키, 벼랑 위에 포뇨, 이웃집 토토로를 차례로 떠올리며 마음을 정화시켰다.



점심때가 되어 밥을 차려 먹었다. 카레와 버섯, 계란, 파프리카 샐러드, 마늘장아찌를 싱크대 위에 소집해 놓고 어떻게 하면 설거지를 최소화할 수 있을지 연구와 논의를 거듭했다. 데운 밥 위에 카레를 붓고 구운 버섯과 계란을 올린 뒤, 마지막 남은 파프리카 위에는 장아찌 7알을 여의주처럼 올렸다. 이로써 테트리스는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뜨거운 밥과 차가운 카레가 만나니 꽤 훌륭한 맛이 났다. 빨래를 막 널고 온 참이라 인중이 축축했는데 시원한 카레 한 입으로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비빔밥 - 콩국수 - 열무국수(비빔밥) - 카레. 이 주기로 네 다섯 사이클 정도 돌고 나면 비로소 여름이 간다. 지금은 비록 혹덥혹습의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동시에 이토록 맛있는 카레가 질릴 때쯤 되면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내일은 건강검진이 있다. 오랜만에 친구과 만나기로 했는데 공교롭게 약속 장소가 병원이다. 검진을 명분으로 약속을 잡은 것이다. 나란히 가운을 입고 수다를 떨 생각에 조금 안심이 된다. 조만간 그곳이 친구들 사이에서 핫플레이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필요한 집안일을 하고 복용 중인 약을 체크하고 금식 모드에 돌입했다. 병원 가는 일에는 공포가 있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서 위안이 된다. 점심으로 죽을 사 먹고 카페에 들러 얘기도 좀 나누다 와야지. 무사히 건강 검진을 마치고 자축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까 그 미래의 파리가 나타나 괜찮을 거라고 말해줬으면 더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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