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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Sep 11. 2024

채우지 않는 만족

옷, 방



이방의 요점은 채우지 않는 미덕이다. 옷을 입을 때마다 인생 최대 난제에 부딪힌 척, 연애 프로 출연자처럼 영혼의 단짝을 찾는 척 따윈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행거는 반 이상 채우지 않는다. 다들 형제처럼 비슷비슷한 디자인이며, 그중에도 매일 입는 옷만 걸어둔다. 입을 옷이 없다는 딜레마의 해답은 옷을 줄이는 일이었다. 가장 소중한 것만 간직하겠다는 마음은 옷을 함부로 사지도, 쉽게 버리지도 못하는 마법에 빠지게 했다.



 문을 열면 긴 벽 쪽으로 2단짜리 왕자행거 2개, 맞은편에 검은색 이케아 철제 수납장이 쌍둥이처럼 놓여있다. 반려인과 각각 하나씩 공평하게 지분을 나눈 것이다. 행거 아래쪽엔 이사오기 전부터 있던 서랍이 있고, 전등 스위치 옆으론 착시 효과가 뛰어난 전신 거울이 세워져 있다. 반대편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1평도 안 되는 창고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계절 지난 옷과 자전거, 반려인의 골프가방을 보관한다.



 의류학을 전공했지만 유행에 민감한 편은 아니다. 여름엔 반팔과 원피스, 겨울엔 코트와 점퍼 몇 개가 전부이다. 동네에 나갈 때는 편한 원피스나 고무바지를 입고, 약속이 있으면 청바지와 남방을 유니폼처럼 입는다. 가끔 반려인이 입지 않는 후드나 점퍼도 주워 입는다. 한여름엔 집에서 쿨하게 러닝바람으로 다니며, 겨울이면 몽글몽글한 극세사 잠옷을 반려인과 맞춰 입고 동면 중인 곰처럼 지낸다. 유일하게 개수가 많은 청바지는 6벌 정도 있다. 나중에 늙어서도 청바지 입는 할머니가 되는 게 로망이라 평소 그 옷엔 진심이 된다. 그렇다고 고가의 브랜드를 따지는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직접 입어보고 편하고 내 눈에 예쁜 옷에 올인한다. 다행히 지금껏 체형의 격변이 없어 웬만한 옷들은 5년 또는 그 이상 함께 하고 있다.



요즘처럼 옷과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선 새것을 사는데 적지 않은 피로를 느낀다. 공시 준비하듯 밤낮으로 살 것들을 집요하게 둘러보지만 막상 손에 들어오게 되면 잡아놓은 물고기처럼,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큰둥한 마음이 되어버린다. 옷으로 태어나 내게 온 이상, 되도록이면 그 쓰임을 다하고 장수했으면 좋겠다. 이건… 스스로에게도 바라는 바이다. 이 방에 들어왔을 때 너무 많은 고민을 하지 않기를, 가장 자연스럽고 나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삶 속의 패션은 옷이 아니라 건강한 몸과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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