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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Sep 22. 2024

평화의 이유 D + 58

240922 소강상태

* 1623번째 일러스트 : 폭우 속 평화 by 최집사



 여름이 곱게 떠날 리가 없다. 추석이 끝나자마자 이틀 내내 오열 같은 폭우가 내렸다. 미련 많은 X처럼 수시로 재난문자도 울렸다. 읽씹도 수신차단도 의미가 없었다. 여기저기 물에 잠긴 길은 빙빙 우회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얌전한 고양이처럼 집에서 실시간 뉴스를 확인하며 지도 속 통행금지 표시를 훑었다. 얼마 전 모 사이트에서 미래의 해수면 상승을 추측한 지도를 캡처해 둔 적이 있다. 사진 속 사라진 지역과 홍수 난 곳이 정확히 일치했다. … 이 모든게 우연일 리 없다.



 수영을 못하지만 산책을 포기할 순 없었다. 다행히 새벽에 잠시 소강상태가 되어 장화와 파라솔급 우산으로 무장해 밖으로 나갔다. 말이 산책이지 목적은 강아지들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보통 50걸음쯤 가면 한 마리씩 나타났는데, 어릴 적 남극탐험 게임 처럼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스퀘어가 쌓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성별과 연령대의 털북숭이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누비는 모습에 무해한 사랑과 평화를 느꼈다. 그간의 경험으로 6시 반에서 7시경, 거리에 강아지들이 가장 많이 분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 집 냥이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질투를 할려나... 혹 물어보면 어떻게 둘러대지 싶다.



걸어서 5분 남짓 거리에 공원이 있다. 매일 같은 시간, 그곳에서  비슷한 사람들을 본다. 주로 중년의 여성들로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의 모습이다. 일찌감치 우린 서로를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진부한 안부 따윈 나누지 않았다. 저마다의 시간과 공간에 방해되지 않게 거리를 두며 느슨한 유대를 형성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토록 강력한 폭우가 온다던 날도 약속이나 한 듯 그곳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자유가 보장된 사이는 무엇보다 끈끈한 결속력이 생긴다. 반대로 관계의 폭이 좁고 촘촘할수록 계급과 적이 생기게 된다.



재벌집 막내딸처럼 홀로 너른 공원을 내 집 안마당인 양 누비고 다녔다. 잘 자란 나무들과 제철마다 피는 꽃, 잘 관리된 잔디와 깨끗한 산책로.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어스름의 새벽 시간을 들여 공유 정원을 누리다 왔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한편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맨발로 걷는 아줌마들… 자신은 비를 맞더라도 신발에 씌어놓은 우산에 눈이 갔다. 그 모습이 고상한 영부인보다, 유능한 정치인보다 멋져 보였다. 누군가의 진정한 모습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때 드러나는 법이다.



일주일째 반려인과 냉전 중이다. 그의 일방적이고 일관적인 무시가 계속되고 있다. 추석 연휴, 주말 내내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밥도 안 먹겠다며 홀로 라면만 끓여 먹고 있다. 누가 보면 나만 잘못한 줄 알겠다. 시간이 아쉽고 귀한 쪽이 죄인이 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병이 나는 스타일인데, 내 성격 탓이라는 그의 말에 나는 나대로 상처를 받았다. 그래도 이번엔 스스로 털어버리려 노력하고 있다.



화는 욕구불만과 자기 방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스로 불완전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이 영역이 취약해지는데 그래서 매사에 가시를 세우고 부정적이며 불평불만이 생긴다. 내가 화병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더불어 소중한 사이일수록 최소한의 존중과 도리가 필요하단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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