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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Sep 20. 2024

단호박 병아리죽

달나라의 병아리들



 끝나지 않는 폭염 탓에 연휴를 휴가로 착각하며 지냈다. 올해도 반려인은 시댁에 혼자 다녀온다 했고, 중년의 베짱이는 가을가을 노래를 부르며 더위와 맞짱을 떴다. 본가에는 지난주에 미리 다녀왔다. 부모님 댁은 차로 30분 남짓 거리라 마실 삼아 훌쩍 다녀왔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각자 할 수 있는 만큼의 셀프 도리를 하고 있다. 막상 연휴에 홀로 보내는 게 적적하기도 했지만, 어색한 분위기에 눈치 보는 이등병의 마음이 되지 않아 속은 편했다. 누군가에겐 경우 없는 사람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만큼은 경우에 맞는 시간을 보냈다는 게 다행 중 다행이다.



 변할 거 없는 일상이지만 마음은 약간의 여유를 느꼈다. 친구들과 통화도 하고, 언니 조카와 톡도 주고받으며 나름의 랜선 한가위를 만끽했다. 오랜만에 아침 일찍 영화도 보고 오고, 산책도 다시 시작했다. 공원을 거닐다 동네 어르신들이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는데, 이제 제사도 안 지내고 쉴 수 있어 좋다는 내용이었다. 호위무사 같은 강아지들과 발맞춰 걸으며 담소를 나누시는 뒷모습을 바라보니 해방된 조국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휴가 끝나고 병원 가는 날이 돌아왔다. 한 달에 한 번 꼴인 이 날이 올 때마다 시험 앞둔 공시생처럼 긴장이 된다. 지난번 산부인과에서 받은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라 며칠 전부터 신경이 쓰였다. 예민해진 탓에 반려인과도 좀 투닥거렸는데… 명절이 오니 누구나 까칠해진다. 어릴 시절 이맘때쯤 어른들이 싸우는 모습을 몇 번 봤던 거 같다. 그 시절 학습 때문인지 해마다 이쯤 되면 느껴지는 묘한 불안이 있다.



살만하니 싸우게 된다. 치명적인 사고를 겪었거나 사경을 헤매는 고통 속에선 오히려 관계가 돈독해지고 일상을 되찾기 위해 희생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사지 멀쩡한 상태가 되면 망각의 회로가 작동해 천년만년 살 것처럼 기고만장해진다. 그제는 친구네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정신 차리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뜻 같아 틈틈이 뚱해 있는 그에게 자꾸 말을 건다. 잘잘못을 떠나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괴롭히며 스스로에게 화내는 일은 그만하고 싶다.



추석을 맞이했으니 송편 아니 보름달 같은 죽을 끓였다. 평소보다 유달리 부은 달의 면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저 넓은 곳엔 토끼만 살으라는 법은 없다 싶다. 한때 애정하던 계란 과자가 머릿속을 스치는 게 분명 병아리도 동거중일 거라는 의심이 든다. 저리도 노랗다는 건 토끼 의자왕이 삼천 마리쯤되는 병아리를 거느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 음, 헛소리는 이쯤에서 그만둬야겠다.



하루 불려놓은 삼천마리?의 병아리콩을 꺼내 손질한 단호박과 냄비에 넣고 푹 삶는다. 김이 올라오면 믹서에 붓고 두유와 꿀을 넣어 곱게 간다. 다시 넘치지 않게 한소끔 끓인 뒤 그릇에 담는다. 새알 크기로 자른 떡볶이 떡을 올리고 올리브유와 파슬리를 뿌린다. 취향에 따라 후레이크처럼 강정을 부셔 넣거나 견과류를 넣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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