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는 질서가 없었다. 'Women Only'라고 적혀 있어서 사람들이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성별로 나눠 타는 것 외에는 질서를 지키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들의 쓰레기통은 자신이 쓰레기를 들고 있는 바로 그 자리였고, 화장실도 자신의 배변 욕구가 있는 그 순간이었다. 기차 좌석도 표에 있는 좌석 번호는 숫자에 불과했다. 기차표를 살 때 새치기하기는 일쑤였다. 질서 없는 사회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인도에서 한국의 가장 그리운 것이 뭐냐고 묻는 다면 단연 질서였다. 질서는 안정성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안정성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안정성의 장점은 더 빠른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길과 길 사이를 건널 수 있는 수많은 위치 중 건너라고 지정 된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켜지길 기다렸다 건넌다. 그렇지 않으면 야생 사슴이나 들 고양이들처럼 차에 치여 처참하게 죽을 수도 있다. 질서를 지키지 않는 건 위험한 행동이고 사회 발전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인도는 그런점에서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국가였다. 도로에서 그들의 신호등은 클랙슨이었다. 자동차나 오토릭샤나 사람이나 서로가 먼저 지나가려고 했고 사고 직전까지 가는 아슬아슬 순간들을 일상적으로 접했다. 공무원들도 그랬다. 외국인을 위해 설치 된 기차티켓 부스에는 반복된 업무에 지친 하급 공무원들이 관광객을 맞았다. 그들은 거스름돈이 없으면 주지도 받지도 않았다.
경찰들 역시 사람들로부터 벌금을 받는 기준은 확고했다. 돈을 주느냐 마느냐였다. 불법을 저질러도 돈만 있으면 용서 받았다. 외국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번은 한 기차역에서 성희롱을 당했다. 사실 성희롱을 당한 게 한, 두번이 아니지만 그 경우마다 성희롱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해서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그 기차역의 성희롱은 지칠대로 지친 나의 감정과 너무나 확실한 정황을 고려했을 때 절대 그냥 넘어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내 엉덩이를 만진 후에도 유유히 걷고 있는 그 남자의 뒷덜미를 잡았다. 마침 지나가는 경찰이 있길래 뒷덜미를 잡은 채로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은 알아듣지 못했고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한 인도인이 경찰에게 내가 성희롱을 당했다고 말해주었다. 그 통역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찰은 몽둥이를 꺼내 그 남자가 쓰러질 때까지 마구잡이로 때렸다. 사람들이 나와 경찰, 그 사람을 삥 둘러 싸고 지켜봤다. 아무도 경찰을 말리지 않았고 단지 무슨 일인지 호기심이 가득 어린 눈으로 우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 사람의 옷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피가 흘러 나왔다. 나는 그 상황이 감사하고 통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식의 처벌이 불편했다.
이 사건은 나에게 '질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내 생활을 물리적으로 통제하는 것들만 질서라고 생각했다. 화장실을 줄서서 들어가거나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질서는 그런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도덕 관념에 의한 질서도 가지고 있다. 도덕 관념이란 어렵고 거룩한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지 않게 하는 행동이 도덕적 행동이다. 우리는 질서를 지키지 않고 도덕적으로 이해 받기 어려운 행동을 하면 인상을 찌푸린다. 질서에 어긋나는 것은 비주류로 만든다.
우리에게 가해진 정신적 질서에는 내가 고통받고 있는 다이어트도 분명 관련있었다. 내가 지금 마르지 않은게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이유가 질서를 지키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다. 뚱뚱한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린다. 뚱뚱한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으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대체 질서는 누가 만들고 어떻게 유지 되는 건지 궁금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질서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사기도 진절머리나게 많이 당했다. 릭샤꾼과 흥정을 해서 릭샤를 타고 타지마할로 향하고 있었다. 릭샤꾼은 200m 정도 자전거를 몰더니 다 왔다며 내리라고 했다. 우리가 돈을 지불하자 릭샤꾼은 쏜살같이 다시 돌아갔다. 그 곳은 타지마할까지 반의 반도 안 간 거리였다.
인도 상인들은 빈틈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속이려고 들었다. 10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다가 목이 말라 마실 것을 사려고 내렸다. 그 때는 새벽 5시였고 나는 자다가 잠시 깬 상태였다. 나는 콜라와 과자를 사고 돈을 지불했는데 그 상인은 내가 잠시 내려 놓은 콜라를 잽싸게 가져가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나는 눈 앞에서 벌어진 황당한 일에 상인에게 뭘한거냐 물었다. 상인은 "뭐가?"라고 되물으며 나를 이상하게 취급했다. 내가 상황을 설명하며 따지자 상인은 나보다 더 큰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네가 잠이 덜깨서 모르나본데, 넌 과자만 샀어.
정말 내가 꿈을 꾼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상인의 태도는 당당했다. 물건을 사러가도 마찬가지였다. 가격은 제각각이었고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부르기도 했다. 남들에게 들을 땐 왜 저런 걸 사기 당하지 했던 것들도 겪어 보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 번은 도저히 숙소까지 갈 힘이 없어 기차역에서 노숙을 한 적이 있었다. 새벽이 되었고 나는 최대한 빨리 목적지로 가기 위해 기차 매표소가 여는 시간에 맞춰 창구로 갔다. 내가 창구로 가려 하자 자신을 경찰이라고 밝힌 사람이 도와 주겠다고 했다. 내가 표를 사야해서 매표 창구를 찾고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나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정말 매표소가 나왔다. 그런데 표를 사려고 하자 작은 구멍으로 직원이 지금은 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고 했다. 난 분명 그 시간이 표를 팔기 시작하는 시간이라는 걸 봤고 만약 정말 파는 시간이 아니라면 그 직원이 그 곳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절대 팔지 않는다며 한 남자를 가리켜 그 사람에게 사라고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표를 달라고 했다. 가격은 내가 조사했던 가격의 3배였다. 명백히 거짓말이었다. 나는 다시 매표소로 달려가 따졌지만 또 그 직원은 시치미를 떼며 새벽 기차를 예매해 주었다. 날 상대로 한 인도인들의 크고 작은 사기들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속임수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거지들이었다. 나는 평소 한국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에게 돈을 잘 주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명절 같이 내가 외로움을 느낄 때 그들의 슬픔을 공감하고 지갑을 여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걸인들은 사람을 잡고 돈을 달라고 하거나 혐오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돈을 구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피부가 썩어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던지, 잘려있는 팔이나 다리 부분을 강조한다던지 하는 것 말이다.
인도는 말그대로 거지 천국이었다. 한국에서 꽤 흥행한 발리우드 영화에서 끔찍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을 눈을 뽑아 걸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난 그게 허구이거나 한 측면을 과장해 보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도의 상황은 심각했다. 눈이 없거나 팔, 다리가 없는 아이들은 흔했다. 어떻게 다리가 저렇게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모양으로 비틀어진 사람도 많았다. 바라나시에서 만난 한 한국인 관광객은 그런 사람들은 전부 거대 조직에 의해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이라고 했다. 아기를 한 쪽 손에 안고 돈을 구걸하는 엄마들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의 8~90%는 납치된 아기라는 통계도 있다. 그들은 걸인이 아니라 폭력배였다. 길을 가면 여러명이 나를 둘러싸고 돈을 줄때까지 비키지 않았다. 가뜩이나 위험한 인도의 도로에서 길을 건널 때 도로 한복판에서 나를 잡고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 땐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기차 안에서도 거지들은 외국인인 날 타겟으로 삼아 돈을 줄 때까지 내 앞에 서서 날 민망하게 만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난 이왕 웃음거리가 된 거 ‘어디까지 하나 보자’란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던 남자는
- 웬만하면 돈 줘요. 조금만 주면 되요. 처음부터 그게 당신 돈도 아니었을 것 아니오?
처음부터 내 돈이 아니라니? 무슨 밑도 끝도 없이 돈의 근원을 찾는 단 말인가? 내가 그 사람에게 한 마디 하려던 순간 내 앞에서 종을 흔들며 돈을 구걸하던 꼬마가 소리를 질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는데 그게 뜻을 가진 말이었나보다. 그 말을 듣더니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웃었다. 그 순간은 정말 어떤 거지보다 내가 더 불쌍해졌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게 불쾌하고 수치스러웠다.
나는 보통 아주 불쌍해 보이는 거지들을 보면 돈 대신 음식을 사줬다. 길거리에서 파는 코코넛이나 인도식 튀김 만두인 ‘사모사’를 사줬다. 음식을 받아든 아이들은 받자마자 내 앞에서 허겁지겁 먹었다. 물론 고맙다는 인사나 따뜻한 눈 웃음 같은 건 기대할 수 없었다. 자기 볼일이 다 끝나면 쳐다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해 구걸을 하러 이동했다. 구걸의 방식은 다양했다. 유네스코 문화재에 있는 화장실 앞을 빗자루로 쓸고 있는 불가촉 천민은 볼 일을 보고 나올 때마다 손을 내밀었다. 내가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이렇게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있으니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 다양한 방법으로 거지들은 삶을 살고 있었다.
인도에서 서민들의 직업은 거의 세습된다. 아빠가 릭샤꾼이었으면 자식도 어릴 때부터 자전거를 몰고 다니며 릭샤꾼을 하고 직물 파는 장사를 했다면 자식도 그랬다. 그들의 인생은 끈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새롭게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은 획기적인 창의력과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거의 불가능 해 보였다.
나는 우다이 뿌르에서 캐시미어와 실크를 파는 23살 청년을 만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23살 청년과 다르게 그는 이미 40대 아저씨처럼 배가 잔뜩 나와 있었다. 그의 일상은 아침에 예전엔 아버지가 출근 했을 가게의 문을 열고 밤 늦게 가게 문을 닫는 것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가게에 앉아 그와 함께 짜이를 마시며 논 적이 있었다. 그가 점심을 먹으러 잠시 집에 갔다온 시간을 제외하고 약 10시간 동안 손님은 고작 10명 정도가 왔다갔다. 그 중에서도 실제로 캐슈미어나 가방을 사간 사람은 3명뿐이었다.
- 항상 손님이 이 정도 오는거야?
- 응, 요즘 들어 장사가 안돼. 겨우 짜이 값 정도 벌 수 있어.
- 그럼 좀 특별한 걸 팔아보는 건 어때. 이 가게 주변도 다 똑같은 패턴의 천을 팔고 있으니까 차별성이 없어서 장사가 잘 안되는 건 아닐까?
- 그러고 싶지 않아. 난 지금 삶도 충분히 만족하거든. 너무 과한 경쟁은 싫어. 만약 내가 그렇게 차별화시키면 옆 가게도 똑같이 차별화를 시도할테고 그럼 난 또 다른 차별성을 위해 머리를 써야하잖아. 그럼 경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테고 내 삶은 하나도 행복하지 않을거야.
- 행복이 뭔데? 그런 걸 고민하는 과정이 행복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번 돈으로 더 행복해 질 수도 있잖아.
- 나에게 행복은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세 끼의 밥을 마시고 너처럼 좋은 친구와 짜이를 마시는 것에 있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이제 곧 부모님이 소개시켜 준 캘커타에 있는 직물상의 딸과 결혼을 하면 내 삶은 한층 더 행복해질거야.
물론 그 캘커타의 여자를 실제로 본 적은 한번도 없다고 했다. 인도는 성씨만큼의 계급이 있고 보통 같은 계급끼리 결혼한다. 그의 성씨는 '재봉사'란 뜻을 가지고 있었다. 변화를 싫어하는 인도의 모습은 이 23살의 청년에게서만 발견되는 건 아니었다. 길거리에 쭉 늘어선 오믈렛 가게에서도 파는 사람만 다르고 똑같은 오믈렛을 똑같은 가격에 팔고 있었다. 아무도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이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난 무질서와 속임수, 구걸 속에서 점점 '영혼'을 찾겠다는 목표를 지워갔다. 나는 사기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하루를 끝마치는 것이 인도에서 바랄 수 있는 최대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됐다. 물론 그 곳에서는 나에게 다이어트 하라는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내 입에 맞는 음식도 없었기 때문에 난 다이어트에는 더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정신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어쩌면 난 잊고 싶었던 걸 이런 방식으로 내 마음 속에 묻어 두는 것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