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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와와입니다 Aug 27. 2024

추락일지

추락일지


조금은 진부한 제목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짧게 이 글에 대해 말하자면 유복하게 자라 온 한 청년의 몰락기이다. 성실하게 자수성가를 이룬 아버지의 그늘 아래 항상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집안의 아들로 자라왔고 그 생활이 앞으로도 영원할 줄 알았다. 초중고 생활 부족함 없이 자랐고 예체능을 전공으로 했으며 미국으로의 유학 시절 또한 화려하게 보냈으며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편안하고 짧은 취준기를 보내 대기업에 입사해 세상이 내 것만 같았던 한 92년생 남자의 추락기이다.

   

첫 번째 추락


모든 게 한순간이었다. 33년 가까이 살면서 이런 격변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그냥 믿기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정도일 거라고 애써 외면했던 것 같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2024년 6월 24일쯤이었던 기억이다.

이미 어머니께서는 집으로 날아오는 각종 내용 증명들로 상황을 조금은 예측하신 듯했지만 그렇다한들 충격이 작아지는 건 아니셨던 것 같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본가로 향했다. 집안에 들어서며 가장 처음으로 보인건 안 그래도 작은 체구의 어머니가 살이 많이 빠지셔서 거의 뼈만 남아 야위어 계시는 모습이었다. 덜컥 가슴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아버지를 설득하려 노력했던 기억이다. 지금이라도 뭘 건질 생각을 하자고. 하지만 십수 년 당신의 굳은 자존심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궈오신 방법으로 다 잘 해결될 거라는 믿음을 꺾을 순 없었다. 그때까지도 난 애써 아버지를 믿으려 했던 듯하다. 그것만이 내가 내 맘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펑펑 울며 제일 친한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야윈 모습과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넋이 나간채로 며칠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지냈다. 평소 염세주의적인 성향과 불안장애, 우울증 약을 복용하며 죽음에 대해 그리 두려움이 없던 나는 그 당시 한두 차례 자살 시도도 했던 기억이다. 누군가는 뭐 그 정도로 죽음을 생각하냐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일순간 사라졌으며 내가 그려온 미래들을 한꺼번에 빼앗긴 기분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물론 죽음도 쉽지 않았다. 나의 평안을 위한 시도는 실패로 이어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긴 하다만 사실 아직도 매 순간 두렵기도 버겁기도 하다. 평생 특별한 목적 없인 이용해 본 적 없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을 해야 하며 더우면 시원한 공간들로 여행을 떠났던 지난날들과는 달리 지금은 에어컨 전원 버튼을 누르면서도 여러 고민을 해야 했다. 샤워를 하며 온수가 나올 때 돌아가는 보일러 소리에 놀라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가는 경험은 아마 이 정도의 추락이 아니라면 평생 해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초반 2주에서 3주 정도는 정말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었던 기억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웠고 밤이 오면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그 참을 수 없는 고독과 미래에 대한 공포에 사시나무 떨듯 떨었던 것 같다. 그래도 어쩌겠나 죽음에도 실패한 나는 꾸역꾸역 살아나가고 있었다. 체중은 약 15kg 가까이 빠져 행색은 볼품 없어졌으며 눈빛은 모든 희망을 잃은 사람처럼 초점이 없어졌다. 이제껏 편하게 살아온 대가를 한 번에 치르게 하는 건지 가끔 너무 버겁긴 하다.


두 번째 추락


두 번째 추락은 일이 벌어지고 약 2주 정도 흐른 시점으로 기억한다. 사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르는 여자친구의 변심이다. 사실 난 그 사람을 만나며 정말 철없이 살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이룬 부를 나의 능력으로 착각했으며 그 수혜를 여자친구에게까지 나누어 줬다. 지금 생각하면 이 무슨 오만한 태도인가. 부모님께는 평생 죄송할 듯하다. 아마 4년 정도 만나며 최소 수천에서 많으면 억까지도 썼을 듯한데, 어리석은 내 탓이지 누굴 탓하랴. 결국 그녀는 나의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며 자신까지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상황을 이겨내기 무리라는 말을 했다. 뭐 그 정도인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다만 나의 머릿속에선 이제껏 매몰 비용이 있으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듯하다. 현실적으로 미래를 그리긴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4년의 헌신이 내가 추락하기 시작한 2주의 시간만에 날아가버릴 줄은 물론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나의 잘못과 실수들로 자신이 상처를 받아서 이런 상황이 왔다고 말하던 그녀는 내 눈엔 참 이기적으로 비쳤다. 지금 생각하면 결국 그녀는 헤어지자는 말을 할 용기조차 없었던 듯하다. 주변 내 지인들은 말한다 그녀와 결혼까지 생각했었는데 결혼까지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얼마나 더 끔찍한 일이냐고, 잘 걸러낸 거라고. 물론 나도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한다. 다만 순간순간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에 내 마음은 아직 그녀의 편인가 보다. 그녀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내 모습이 초라하고 안쓰러우며 답답하기도 하다. 하지만 머릿속을 차갑게 식힐 땐 나도 명확히 알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닌 내가 가진 조건들을 사랑했던 것이라고, 나와의 미래에서 본인의 편하고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을 테고 그 믿음이 나로 인해 깨졌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것을.

물론 지금 상황에 연애를 꿈꾸는 건 말도 안 되고 가능하리라는 생각도 없지만 차후 다가올 인연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앞으로는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많이 의심하는 버릇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 번째 추락


나는 평소 조카를 퍽이나 예뻐했다.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듯 정말 그 누군가를 대신해 죽어 그가 괜찮을 수 있다면 기꺼이 웃으며 그래줄 수 있다는 생각이 명확하게 들었던 첫 번째 대상이다. 내 첫 번째 조카는 할아버지의 부유함, 본인 아버지의 유능함 그리고 집안 여자들의 모성애를 온몸으로 받으며 세 돌까지 아주 풍요롭게 자랐다. 물론 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덤이었다. 그 작은 아이 웃는 모습 한번 보겠다고 강남, 송도를 왔다 갔다 하며 최대한 자주 보려 애썼고 그녀 또한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며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던 기억이다. 이렇듯 조카는 내게 큰 의미다. 핏줄의 힘을 느끼게 해 준 경이로운 존재였다. 그런 나는 두 번째 조카가 누나에게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나 부부는 해외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고 있어 전화로 전달을 들었다. 타이밍이 정말 좋지 않긴 했다. 저 모든 사건들이 터진 당일 날 우리 가족 모두 이 소식을 전해 들었던 기억이다. 하지만 너무나 기뻤다. 이 모든 상황을 조금이나마 낙관할 수 있게 해주는 희망의 빛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한편으론 걱정도 많이 했다. 누나 또한 모든 상황들로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이었고 혹여나 유산이 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지냈었다. 왜 항상 슬픈 예감은 현실이 되고 모든 시련은 한 번에 오는지. 2-3주 뒤 누나가 유산을 했다는 소식을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또다시 찾아온 무력감과 안타까움, 이유 모를 미안함과 죄책감. 모든 감정들이 한 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첫째 조카 얼굴이 아른거리기도 하고 누나가 힘들어할 모습이 눈앞에 선명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던 날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바닥은 아직이었나 보다.


네 번째 추락 ing


일이 터지고 약 2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상황이 나아지거나 변한 건 없다. 나는 아버지께 급하게 대출로 빌려드린 빚이 억대로 남아있고 강남 한복판에서 편하게 살던 자취방은 급하게 빼 월세가 싼 성북구 쪽으로 이사를 왔다. 이 부분도 좀 아쉬운 게 두 번째 추락이 있기 전이라 그녀의 집과 가까운 곳에 자취방을 얻었다는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으니 운명이려니 하고 있다. 본가는 경매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 급매로 처분해 작은 전셋집을 얻어 어머니께서 이사를 가셨고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노력 중이신지 집에 안 들어오신 지 1달이 넘은 걸로 알고 있다. 그 강인하던 양반께서 식사를 제대로 못하셔 가끔 병원에서 수액을 맞으시며 버티신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아버지의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다. 당신이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들을 신용불량자로 만들었으며 딸의 유산 소식을 들으시고 정말 펑펑 우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어떻게 내가 그의 맘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한 가지 생각은 십수 년 동안 그가 짊어진 짐이 정말로 거대하고 육중했구나 하는 생각이다. 우리 가족들이 지금까지 이런 고통들을 모르며 세상의 밝은 면들을 즐기며 살 수 있었던 건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맘에 관해서라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를 듯하다. 어머니는 가끔 드리는 전화에 태연한 척 연기를 하신다. 물론 태생적으로 연약한 성정을 지니신 탓에 그 짧은 통화에서마저 쏟아지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현재에 대한 불안함이 내게도 전해져 죄스럽게도 그 통화도 부담스러운 기분이 든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어떠한 방식이 됐던 조금이라도 쏟아내고 나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잘 모르겠다. 기분이 나아지는 건지 다만 상황들에 적응은 해 나아가고 있는 중인 듯하다. 이 전엔 집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들었던 나날을 보냈지만 지금은 그래도 무언가 해보려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보면. 이따금씩 전 여자친구에 대한 아쉬움도 머릿속에 맴돈다. 배신감인 건지 그저 미련인 건지. 좋게 생각하려 애쓰는 매분 매초를 보내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추락이 찾아올지 모르는 맘에 두렵기도 하다.


이런 추락의 경험들을 겪으며 한 가지 내가 확실하게 느낀 건 그래도 내가 잘 못 살아온 인생은 아니구나 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소식을 접한 회사 동료들, 내 주변 지인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를 도왔으며 누군가는 금전적 지원, 누군가는 정신적 지원 등 여러 도움들이 있었다. 요즘은 나중에 언젠가 내가 괜찮아지고 털어낼 수 있는 날이 되었을 때도 이 도움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이만.

두 달의 시간을 다시 떠올리니 약간은 힘든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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