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호 잡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책을 사는 습관이 있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겨울이 독서의 계절이다.
겨울만큼 책 읽기에 적합한 계절은 없는 것 같다.
금세 어두워지는 추운 날씨는 안으로 안으로 더욱더 파고들게 하니까.
나에게 겨울은 그런 계절이다.
마치 겨울잠을 자듯 책을 읽으며 칩거하는 생활이 좋다.
겨울에는 곧잘 잡지를 산다.
사 모은 잡지들 중에는 유독 12월호가 많다.
2001년 12월호 잡지책을 꺼냈다.
22년 전, 그해 겨울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도베(DOVE)라는 여행 잡지다.
단골이었던 동네 책방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잡지였다.
재미있을 거라면서 읽어보라고 하셨다.
(이제 그 서점은 없다. 쓸쓸한 일이다.)
12월과는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햇살이 느껴지는 화려한 색감의 표지다.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잡지 내부의 핀란드 산타마을에 대한 글이 12월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휘리릭 책장을 넘겨본다.
팔랑팔랑 넘어가는 책장으로 22년 전의 기사들이 기지개를 켠다.
20년 넘게 잠들어 있던 이야기들이 노곤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지금 봐도 새로운 글들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그 시절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여행을 꿈꿨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일본 여행 소개 글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걸 보니 한 겨울의 일본을 보고 싶었나 보다.
당시에는 요가에 관심이 있어서 요가에 대한 글을 자세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주 오랜만에 12월의 친구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2006년 1월호 도베를 펼쳐 본다.
삿포로에 대한 글이 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한 겨울의 삿포로.
아마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한 겨울 삿포로에 대한 로망이 생긴 것은.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추운 겨울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을 먹는 모습을 상상한다.
나의 일종의 로망이었다.
정작 내가 만난 일본 사람들은 이러한 나의 로망에 손사래를 쳤다.
“삿포로는 겨울에 가면 안 돼. 눈 때문에 호텔 안에 갇혀 못 나올 수도 있어.” 라면서.
그 말에 겁을 먹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 겨울의 삿포로를 가지 못한 걸 보면.
그래도 언젠가는 꼭 12월의 삿포로를 가보고 싶다.
나의 로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2018년 12월호는 가계부를 위해 샀다.
손으로 직접 가계부를 적어보겠다 마음먹고 부록으로 가계부를 주는 잡지를 선택했다.
결국 가계부는 며칠 쓰다 말았지만.
세세하게 적자니 의외로 수고로움이 많이 들었고, 매일 쓰는 돈의 액수를 알게 되니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컸다.
가계부의 순기능을 벗어난 역효과에 나는 깨끗이 포기했다.
당시의 가계부는 버렸다. 놔둘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2023년 12월. 나는 5년 만에 다시 가계부를 위해 12월호 잡지를 구입했다.
이번에도 금세 그만둘지도 모르겠다.
꼼꼼하게 다 적으려고 하면 그렇게 될 확률이 높겠지.
그러니 대충 적어보려고 한다.
2024년도 가계부는 버리지 않을 작정이다.
다시 10년 20년이 지나 꺼내보면 잡지만큼이나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나는 잡지를 사면 대부분 버리지 않고 모아둔다.
딱히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매해 잡지가 쌓이면 연도에 상관없이 같은 달의 잡지를 읽는다.
그게 전부다.
나는 22년 전에 만난 12월호 잡지를 꺼낸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내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들은 낡지 않았다.
지금 읽어도 손색없는 글과 사진들이 빼곡하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쌓인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 날, 다시 2001년도 12월호의 잡지를 꺼내 볼 때는
"나 여기 가봤어, 네 말대로 참 좋더라."라고 책과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되면 좋겠다.
2006년도 12월호를 펼치면서
"한 겨울의 삿포로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좋았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2023년 12월호 잡지를 펼치면서는
그해 겨울, 우리의 여행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4년도 가계부를 들춰보는 어느 날에는
그때 우리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해
추억하며 미소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12월은 그런 달인가 보다.
겨울은 그런 계절인가 보다.
어쩐지 마음이 꽁꽁 얼어붙기도 하고, 또 따뜻하게 녹기도 한다.
나는 수많은 12월을 보냈고, 앞으로 또 수많은 12월을 보내겠지.
그럼 나의 잡지들은 내가 보낸 계절의 횟수만큼 늘어나겠지.
할머니가 되어서 지난날 내가 사 모은 겨울의 잡지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무엇을 추억하게 될까.
12월이 되면 잡지를 산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의 이야기를.
아무 때나 불쑥불쑥 찾아오는 친구가 아닌, 때 맞춰 찾아오는 친구 같은 책.
나는 아주 오래된 12월호 잡지를 꺼낸다.
정말 오랜만이야.
우리는 잊고 있던 이야기들을 나눈다.
밖은 아주 춥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우리는 따뜻한 방 안에서 오랜만에 오손 도손 이야기를 나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