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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읽는

삼국지

by 차분한 초록색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어서 그런 건가.

자꾸만 관우와 조조의 이야기가 핑크핑크하게 보인다.



지난날 조조가 장군에게 매우 두텁게 대했으니 장군도 마땅히 조조에게 보답을 하려 들 것이오.

이제 조조는 싸움에서 진 뒤에는 반드시 화용도로 갈 것인데 만약 장군을 거기 보낸다면 어찌 되겠소?

틀림없이 조조를 그냥 놓아 보내고 말 것이오.

-삼국지6 p.132



위와 같은 제갈공명의 말에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만일 조조를 놓아준다면 군법에 따라 처벌을 받겠다고 군령장까지 쓰고 떠난 관우였지만.



굳이 조조의 인사말을 못 들은 체 자신의 맡은 일만 밝혀 엄한 기색을 지었으나 그런 관우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희미한 떨림이 있었다.

-p.161



어딘가 희미한 떨림이라...


아... 흐음....

오래전 헤어진 연인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는 그런 느낌일까.


조조는 또 어떤가.

싸움에 대패해서 쫓기는 와중에도 허세를 부리며 껄껄 웃던 그가 관우를 다시 봤을 때...



미처 조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소리 포향이 울리더니 길 양쪽에서 오백 명 남짓의 군사들이 칼을 휘두르며 쏟아져 나왔다.

앞선 장수는 다름 아닌 관운장 그 사람이었다.

청룡도를 비껴든 채 적토마 위에 올라 길을 막고 섰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 같았다.

관운장을 본 조조의 군사들은 간이 떨어지고 넋이 흩어진 듯 서로 얼굴만 마주 볼뿐 입 한번 떼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조조는 역시 달랐다. 우두머리다운 기백을 잃지 않고 비장한 결의를 내비쳤다.

-p.160



관운장 그 사람...

관운장 그 사람...

청룡도를 비껴든 채, 자신이 선물한 적토마 위에 올라 있는 모습.


그 모습을 보고 기백을 잃지 않고 비장한 결의를 내비치는 조조는, 오래전 사랑했던 연인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허세를 부리는 모습 아닌가.



네가 보기엔 내가 지금 잘 못살고 있는 거 같겠지만, 나 지금 되게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대략 이런 느낌이랄까.

하지만 결국엔 무릎을 꿇고 마는.



나 : (혼자 흥분상태) 이거 봐, 이거 봐. 관운장 '그 사람' 이래. 이거 너무 막 설레는 포인트 아니야?


남편/아이 : (어이없는)....


나 : (눈치 없이 계속 흥분) 관우의 목소리에 희미한 떨림이 있었대!


아이 : (옅은 한숨을 내쉬며) 엄마, 진짜 그건 아닌 거 같아요.


남편 : 자기처럼 삼국지를 읽는 사람이 있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 : 이 감동 파괴자들! (다시 책을 읽는다)



그런데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이 사건을 제갈량과 관우의 서열 다툼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제갈량의 우위가 확보되었다고 해석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 사실 관우는 제갈량이 나타나기 전만 해도 유비 진영에서는 자타가 인정하는 이인자였다.

... 제갈량은... 관우가 끝내 조조를 놓아 보내리란 것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p.170



끝내 놓아 보낸다...


아...

나는 탄식했다.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게 될 것을 알면서도...

아니지.

조조를 잡지 못하면 군법에 따르겠다는 군령장까지 쓰고 나왔으니, 죽음을 무릅쓴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놓아 보낸다...


또르륵...



하지만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아준 이 그림 같은 광경은 정사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 이 부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연의를 지은 이의 탁월한 소설적 재능일 뿐 그걸 바탕으로 한 역사적 사실의 해석은 비약 이상의 억지가 될 것이다.

-p.170



그림 같은 광경...

탁월한 소설적 재능...


네!! 동의합니다!!

너무 아름답고 멋있는 장면이었어요.


처음 삼국지를 읽던 때의 나는 분명 이랬을 거다.


바보 아니야?

저 때 그냥 조조를 잡았어야지.


그렇게 관우를 비웃고.


조조, 역시 영악하네.


하면서 헛웃음을 지었으리라.

때문에 기억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거겠지.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독서의 묘미는 이런 거 아니겠어.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거.

나이에 따라, 언제 읽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


그런데 국어 시험 볼 때는 작가의 의도나 주제 같은 거 그냥 외워.

네가 생각하는 의도나 주제는 필요 없어. 알았지?


노파심에 덧붙였다.


그냥 무조건 외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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