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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분한 초록색 Apr 04. 2024

안녕, 달이

재작년, 아이가 과학 학원에서 달팽이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들어있던 달팽이는 내 엄지 손가락 정도의 크기였다.

아이는 ‘달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때부터 달이는 우리 집 한편에 자리를 잡고 무럭무럭 자랐다.


나는 달이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게 신기하고 좋았다.

나한테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아이보다 내가 더 달이에게 빠져들었다.


내 엄지 손가락만 하던 달이는 어느새

아이의 주먹보다 커졌다.


그 사이 플라스틱 컵에서 작은 사육통으로 또 좀 더 큰 사육통으로…

그렇게  점점 더 넓은 평수로 달이는 3번의 이사를 했다.

인터넷에서 달팽이 사료와 흙 등을 판다는 사실도 달이 덕분에 알게 되었다.

달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보리 가루와 상추 그리고 분필이었다.



달이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돌아다니는 아이였다.


그러던 달이가 어느 날부턴가 잘 먹지 않았다.

좋아하던 당근과 상추는 매일 아침 그대로 있었고

분필이나 보리가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먹은 게 없으니 응가도 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자신의 단단한 껍데기 안에 들어가 잠을 잤다.

욕실로 데려가 샤워를 시켜주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늘 잠을 잤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달팽이들도 겨울잠을 잔다고 했다.

아, 그런가 보네. 달이도 겨울잠을 자려고 하는가 보네.

나는 내 멋대로 맘 편하게 생각해 버렸다.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생각해 봤더라면

그전 겨울의 달이에게는 겨울잠 따위는 없었다는 걸 깨달았을 텐데.


어쩌면 나는 조금 귀찮았던 건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사육통 안의 배설물을 치우고

때마다 흙을 갈아주고 먹이를 주고 때때로 샤워를 시켜주는 일련의 모든 일들이

귀찮아졌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달팽이도 겨울잠을 잔다는 말을 쉽게 믿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처음 달이가 우리 집에 왔을 때는,

햇살 좋은 봄날에는 베란다로 데리고 나가 밖을 보여주고

비가 오는 날에는 놀이터로 데리고 나가 비를 맞게 해 주었다.

꽃을 사 오는 날에는 작은 한 송이를 달이에게 주었다.

TV를 볼 때는 사육통을 들고 와서 옆에 두고 함께 보기도 했다.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면 달이가 흥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신기하고 예뻤으니까.


"엄마는 나보다 달이를 더 좋아해!"라고 아이가 말할 만큼 나는 달이를 좋아했다.



겨울이 되었고, 나는 춥다는 핑계를 대며 달이를 방치했다.


달이는 아주 깊은 겨울잠에 빠져들었고, 깨어나지 않았다.

지난 주말, 우리는 달이를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기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달이의 생은 행복했을까.

좁은 사육통 안이 자기 삶의 전부였던 달이.


나는 아마도 달이를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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