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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아이를 키워 준 나의 책 친구들

육아는 책 처럼 되지는 않아 - 육아서에 대한 추억

by 차분한 초록색

평판 좋고 인기 많은 친구가 나와 꼭 맞으라는 법은 없다.

책도 마찬가지다.

유행하는 베스트셀러가 나와 맞지 않는 경우는 흔하니까.


나보다 먼저 아이를 낳은 친구가 꼭 읽어보라며 추천해 준 책이 있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그 책에 나온 내용대로, 책이 해주는 조언대로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힘들어졌고, 아이는 불안해 보였다.

대체 왜 우는지 알 수 없는 아이에게 나는 뭘 해주면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책 대로 라면 아직 분유를 먹일 시간이 아니니 주어선 안된다.

졸린 걸까? 하지만 규칙적인 수면 습관을 위해 아무 때나 재워서는 안 된다.

나는 왜 책대로 되지 않는 걸까 생각하며 불안해했다.

아이는 계속 울었고, 나는 점점 더 피폐해졌다.


매번 아이가 분유를 먹는 시간과 양을 기록하고,

기저귀를 간 횟수를 기록했다.

당시의 나의 글쓰기는 그러한 기록이 전부였다.

하루에 쉬는 몇 번 했는지, 변의 모양은 어떤지,

분유는 몇 밀리미터를 마시고 잠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얼마나 잤는지,

낮잠은 또 언제 얼마나 잤는지 등.

책의 부록으로 딸려 온 체크리스트에 빠짐없이 적었다.


배고프다고 우는 거 같은데, 그냥 먹이면 안 될까?

졸려서 우는 거 같은데, 그냥 안아서 재우면 안 될까?

책 친구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 내 아이가 버릇이 나빠지고 점점 더 키우기 힘든 아이가 될 거라고 속삭였다.

나는 어느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책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나와 맞지 않는 친구와 억지로 어울리다 보면

정작 나와 잘 맞는 좋은 친구를 사귈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나와 맞지 않은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죽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래된 미래 - 전통 육아의 비밀>이라는 책 친구였다.

새로운 친구는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괜찮으니까 아이가 울면 안아주고, 배고프다고 울면 먹이라고 했다.

많이 안아주고 업어주라고 했다.

손 타니까 안아주면 안 된다는 말 따위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나는 조금 편안해졌다. 아이도 예전만큼 많이 울지 않았다.


육아에도 트렌드가 있다.

당시에는 수면교육과 모유수유가 엄마들 사이의 화두였다.

하지만 나는 트렌드를 쫒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그냥 아기가 울면 재우고 먹이고 하는 생활을 했다.

큰 틀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밤이 되면 자고 아침에는 일어나는 생활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한 고비 넘겼다 싶으면 또 고비가 찾아왔고, 매일매일이 너무 힘들었다.

그때 나를 도와준 친구는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라는 깜찍한 표지의 책이었다.

귀여운 아기 얼굴이 큼직하게 그려진 표지를 넘기면

개월수별로 아기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가 그림표로 나와 있다.

아기와 엄마가 힘든 시기는 천둥 번개로 표시되어 있고,

조금 수월해지는 시기는 해님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세상에나! 맑은 날보다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을 통해서 지금 아이의 머릿속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맨날 울고 보채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힘들지만 아이는 더 힘들겠구나 이해하게 되자 견딜만해졌다.


그 외에도 수많은 육아서 친구들이 내 곁에 머물다 갔지만, 기억에 남는 친구는 몇 안된다.

학창 시절 친구들 중에 오래 기억에 남는 친구가 몇 안 되는 것과 같다.



다섯 살이 된 아이는 유치원에 들어갔고,

이때부터는 어울리는 책 친구들의 부류가 조금 달라졌다.

나는 어느샌가 육아서보다는 교육서와 더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공부 두뇌, 공부의 힘, 공부력, 공부 방법, 뇌발달, 조기교육, 엄마표 영어 등등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아이가 자랄수록 교육서는 점점 더 무서워졌다.


영어 공부는 이렇게 해라, 수학 공부는 저렇게 해라, 대치동 공부법은 이렇다 저렇다.

특목고 입시는 초등부터 해야 한다 같은 내용의 책들이 내 책장에 꽂히기 시작했다.

착하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무섭게 변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나 자신을 들들 볶아대고 있었다.

불안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영 뒤처지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애들은 이렇게 하고 있겠지.

다른 엄마들은 저렇게 하고 있겠지.

내가 정보에 느려서, 야무지지 못해서 내 아이가 뒤쳐지게 되면 어떡하지.

두려웠다.

책 친구들에게 위로받고 도움받고 했던 시절은 아득히 멀어졌다.

나는 그들의 말에 포로가 되어 전전긍긍했다.

더 이상 이런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 졌다.

나는 그들과 서서히 멀어졌다.



책장에서 묵묵히 나를 기다려 준 오랜 친구들

아이에게 소개해 주기 시작했다.

키다리 아저씨, 제인 에어, 모모 같은 친구들을.

아이도 내게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해 준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의 책 친구들을 소개해 주고 함께 이야기 나눈다.

최근에 나는 퍼시 잭슨이라는 친구를 소개받았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의 아이라고 했다.

우리는 퍼시 잭슨의 모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제 육아서와 교육서는 그 시절의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친구들에 대한 추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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