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압기의 항변
지난 일요일
"엄마! 전기가 나갔어요!"
아이의 말에 잠에서 깬 건 오후 4시 즈음.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주말이면 조용한 단톡방에 "정전된 거 맞나요?"라는 글들이 올라왔다.
어느 동은 정전이고 어느 동은 아니라고 하니, 이유를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관리사무소는 계속 통화 중
갑자기 소방차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내다보니 관리사무소 쪽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덜컥 겁이 났다.
아이가 애착인형과 지갑을 챙기기 시작했다.
"엄마! 대피해야 돼요!"
우리는 해야 할 숙제들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밖에 나와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소방차가 세대나 왔으니 괜찮을 거라는 대책 없이 낙천적인 생각을 갖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금방 들어올 줄 알았던 전기는 알고 보니 변압기 폭발로 인한 것이었다.
언제 복구가 될지는 확답할 수 없다는 관리소무소의 말을 단톡방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 순간, 가장 먼저 걱정된 건 냉장고 속 음식이었다.
아, 나는 왜 하필 어제 장을 보고 냉장고를 채웠을까.
앞으로는 냉장고를 꽉꽉 채우지 말아야지
오늘 하루는 해가 지면 일찍 자야겠네 싶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카페를 나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후끈후끈한 열기를 가득 머금은 채 새까만 어둠에 잠겨있었다.
그 흔한 손전등도 하나 없이 우리는 핸드폰 불빛에 의지한 채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기서 오늘 밤을 지내는 건 무리라는 남편과 아이의 강력한 의견 때문이었다.
급하게 집 근처 호텔을 예약했다.
갑자기 휴가라도 가는 듯 들뜬 기분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들다니. 나도 참 대책 없는 사람이구나 싶었지만.
늘 길을 지나다니면서 보기만 했던 호텔로 차를 몰았다.
아파트 단지는 암흑이었다.
모든 빛이 사라진 단지는 고요하고 깜깜했다.
호텔로비에서 체크인을 하다가 아는 집을 만났다.
그 집도 우리처럼 더위와 어둠을 피해 이곳으로 왔다.
반가웠다.
어둠 속에 남은 사람들, 떠나온 사람들.
모두들 오늘 밤 무사히 잘 넘기라는 인사를 끝으로 단톡방은 불 꺼진 아파트처럼 조용해졌다.
그래, 터질 만도 하지.
덥다고 하루종일 돌리는 에어컨에 예전보다 늘어난 각종 전자기기들.
쉬고 싶었겠지.
아이는 호텔에서도 미처 다 하지 못한 숙제를 하고 있었다.
변압기도 쉬고 싶어 터지는 마당에 호텔까지 숙제를 챙겨 와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오늘은 그냥 올림픽 경기 보면서 놀까?
아이가 냉큼 침대 위로 올라온다.
방학숙제로 써가야 하는 여행문에 지난주 일요일 호텔에 간 일을 적겠다는 아이.
그게 무슨 여행이야?
갑자기 떠나게 된 여행이라고 하면 되죠.
변압기가 터지는 덕분에 네가 터지지 않았구나.
이렇게 여름방학의 추억이 또 하나 생겼다.
<이미지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