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회사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오늘 오후였다.
점심 식사 후라 시계는 1:30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친한 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언니, 어젯밤에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장례식장을 못 찾다가 이제 잡아서 알려요."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한 달 전쯤 만났을 때,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더 이상 병원에서 쓸 약이 없다고 했다며, 튜브를 통해 음식을 드신다고 들었다. 아프신 지 5년쯤 되다 보니, 친구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들이 쌓여 온 듯했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건, 1999년.
전국 영어 경시대회에 지원했던 대학교 시절, 친구는 1등, 나는 2등을 해서 부상으로 둘이 호주 시드니에 있는 맥콰리 대학에서 3개월 영어연수를 부상으로 받았더랬다.
그렇게 3개월 같이 호주에서 살면서 우리는 친해졌고, 그즈음 시험장에선가, 아니면 이동하는 차 안에서 친구의 어머님을 처음으로 뵌 기억이 있다.
서울 한양대 장례식장이라,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퇴근하자마자 바로 나서지 못해서 이내 미안한 마음과 조급한 마음으로 환승역을 지나고, 한양대역에 내려서는 막 시골에서 상경한 시골 여자처럼 두리번거리며 6번 출구를 찾아 헤맸다. 분명히 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나왔는데 다시 개찰구를 카드 찍고 들어가야 6번 출구가 있었다. 왜 그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양대역은 지나치기만 했었지, 이렇게 내려서 학교 부근의 가게들을 지나 언덕 위로 걸었던 적이 없는 듯했다. 역시 대학 가다 보니 각종 술집과 노래방, 즐길 수 있는 상점들이 가득하다. 얼큰 취해서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며 그 시절에 가장 인생에서 무겁다고 느끼고 있을 그 고민들을 담배 연기에 담아 하늘로 뱉어내는 청년들이 보였다.
그래, 나에게도 저 시절이 있었지. 순간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라는 이상은의 노랫말이 생각났다. 한창 가슴 설레는 꿈도 안고, 세상이 나를 절벽 끝으로 미는 것 같은 절망도 만났던 이십 대 시절. 생각해 보면 그때도 내가 세상의 중심이었지, 엄마의 희생이나 사랑이 크게 다가오진 않았었다. 그냥 너무나 당연한 존재였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도 당연했고, 용돈도 당연했다.
그런 당연함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비로소 내가 첫아이를 낳고 깊이 깨달았던 것 같다. 나도 엄마가 되고 나니 자연스러운 희생이 이런 것이구나 배웠다고나 할까.
27년 지기인 친구는 나보다 3살은 어리지만 결혼도 조금 빨리하고, 첫아이도 빨리 낳았다. 내가 이곳 분당에서 신혼을 시작하게 된 것도 그 친구가 사는 곳이 좋아 보여 친구 따라오게 된 것이고, 그 후 매년 크리스마스를 두 가족이 같이 보내며 아가시절의 가장 예뻤던 추억을 나눈 사이이기도 하다.
장례식장엔 어느덧 고3이 되어버린 친구의 딸아이를 오랜만에 만났다. 처음 그 아기를 만나러 간 날, 아기 침대에서 뒤척이다 깨어나 부스스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기저귀 찬 볼살 통통 아가 얼굴이 아직도 선한데, 지금은 어엿한 숙녀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한참 중등 사춘기가 최고조일 때, 친구만 챙기고 엄마는 뒷전이라며, 친구는 만날 때마다 상기된 얼굴로 한탄했었다. 그러나 지금 19살, 고3 언니야가 된 모습을 보니 너무 기특하고 예쁘고 대견해 보였다. 엄마의 미니미로 어쩜 그렇게 의젓하게 잘 자랐는지 장례의 슬픔 속에 꽃같이 밝은 희망의 빛이 아이에게서 새어 나오는 듯했다. 손님 왔다며 엄마를 챙기는 모습을 보니 이제 친구는 아이를 다 키웠다는 안도의 마음이 들 정도였다.
약간 붉어진 눈가의 친구를 안아주고 장례식장 식사 자리에 앉았다. 갑작스레 맞는 죽음이나 5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헤어지는 시간을 갖는 죽음이나 그 슬픔은 같은 무게이겠지만, 친구는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거치며 많은 마음의 준비를 한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인 친구는 올해도 고3을 맡았는데, 이렇게 학기 방학 중에 엄마가 떠나신 것이, 끝까지 나를 생각해서 바쁜 시간 피해서 가신 것 같다며 말하는 데 울컥했다. 담담하게 내뱉는 말이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언니, 서진이가 할머니랑 나눈 문자를 봤는데, 사랑한다는 그런 말은 하나도 없더래요. 할머니, 서브웨이 샌드위치 사다 주세요. 소스는 00걸로 하고, 00는 빼고요. 이런 대화만 있더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두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돌봐주신 우리 엄마 모습이 겹치면서 한 번 더 가슴이 미어졌다.
그렇게 내리사랑이다. 손주가 사랑을 표현하면서 '할머니 사랑해요, 감사해요'라는 말을 내뱉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일상 아닌가. 엄마의 사랑은 자식에게 흐르다 못해, 그 자식의 자식에게까지 조건 없이 흐른다. 어떤 보은이나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아닌 물이 위에서 아래서 흐르는 자연의 이치와 똑같이 흐른다.
긴 간병 시간 동안 고생했다, 더 깊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연이어 방문하는 조문객들로 인해 우리의 대화는 끊기다 이어지다를 반복했다. 발인 날 추울지도 모르니 가져간 핫팩과 장례식장에서 비슷한 음식만 먹으면 질릴까 봐 가져간 빵을 건네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나도 아빠의 장례식장을 찾아 주었던 사람들의 얼굴은 평생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공간을 유쾌한 웃음과 수다로 채워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언젠가 꼭 갚아야 하는 은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친구도 입관, 발인, 연이어 남은 절차들을 지날 때는 어쩌면 덜 실감이 날 수도 있겠다. 진짜 슬픔과 오열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가슴을 찌르는 아빠의 흔적과 기억들이었다. 아빠가 좋아하던 김치 된장찌개를 한 스푼 입에 넣다 생각이 나고, 아빠가 마지막 때에 자주 입던 수면바지를 보면 생각이 났다. 그렇게 일상에 돌아왔을 때, 부디 친구가 슬픔을 만나더라도 너무 깊이 빠져 있지 않기를, 엄마가 남기신 사랑의 힘으로 소중한 딸내미와 잘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했다.
다시 역사로 돌아와서는 집까지 1시간가량 걸리는 거리라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개찰구 근처에 양말 파는 매대가 보인다. "양말 1켤레, 3,000원".
"엄마 나 흰 양말 좀 사줘. 흰색이 검은색 되겠어."
어젯밤, 중2 병 왕림으로 기분이 오락가락하며 흰 눈동자 보이기를 시전 하는 딸내미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오늘 늦게 가느라 저녁을 못 차려주니, 미안한 마음에 그렇게 좋아한다는 두쫀쿠 쿠키를 하나 사서 들고 가던 차였다. "양말 얼마예요?" "한 켤레 3000원인데, 다섯 켤레 하면 만 원에 줄게요. 그게 낫지~." 아주머니의 호객행위에 넘어간 나는 검은 봉지에 다섯 켤레 흰 양말을 들고 지하철을 탔다.
일상이 바쁜 워킹맘 엄마로서 아이에게 못 해주는 점이 발견될 때마다 늘 미안하다.
나에게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잘 먹어주면 그게 나의 행복이고, 아이가 웃으면 내가 좋은 엄마같이 느껴지니 말이다.
고맙다는 말이 없어도 손녀에게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사다 주셨던 할머니의 마음이, 내가 산 검은 봉지에도 담겨 있구나, 새삼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인생이고, 이런 게 일상이구나.
어느 순간 이 일상이 끊기고 갑자기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검은 스크린이 떠도, 남은 사람들은 또 살아가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겠지.
그러면 더 큰 후회가 남지 않도록, 틈틈이 더 많이 표현하고 살아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