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식들이 아버지를 닮는 것에 관하여

「에세」 94

by 루너

이번 글의 제목은 '자식들이 아버지를 닮는 것에 관하여'지만 내용을 보면 차라리 '의학 비판'이 제목으로 어울릴 지경이다. 40쪽이 넘는 제법 긴 글을 통해 몽테뉴는 당대의 의학을 비판한다. 직접 읽으면 알겠지만 비판의 강도가 꽤 높고 신랄하다. 어쩌면 분란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제목을 저렇게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사연은 이러하다. 몽테뉴는 에세를 쓰다가 결석증을 진단받았다. 몽테뉴는 결석증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면 치료를 받으면 되겠지만, 몽테뉴는 조상으로부터 결석과 함께 의학 혐오를 물려받았다. 그가 살면서 한 경험들도 의학에 대한 불신을 남겼다. 예를 들어 포도주를 먹여 키운 염소의 피가 몸에 좋대서 키웠는데, 염소가 결석증을 앓았다고 한다. 그때의 몽테뉴는 결석증을 앓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결석증을 앓을 사람이 결석증을 앓는 염소의 피를 마셔서 건강해지리라는 판단은 하기 어렵다. 이런 경험들이 쌓인 결과, 몽테뉴는 "그냥 좀 놓아두자. 자연의 질서는 따르는 자들을 인도한다."라며 결석증에 순응하기로 결심한다.


몽테뉴의 의학 비판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당대의 의학과 현대의 의학이 모습이 아예 달라서 공정하게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체 기관을 기계 부품처럼 다루며 체계도 정립돼있는 현대 의학과는 달리, 당대 의학은 환자를 진찰하기 위해 별자리 같은 것을 반영하는 등 비과학적인 측면이 강했다. 애초에 본질이 다른 대상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대에도 의미가 있는 대목도 몇 있다. 사람의 생명을 쥐락펴락하는 분야이기에 그에 걸맞은 권위는 지금의 의학만큼이나 크게 갖고 있었지만, 의사들이 그에 걸맞은 책임감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당대 의학이 성립하는 과정도 문제가 있었다. 유학자들이 공자의 말을 끊임없이 연구하듯, 당대의 의학자들도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의학 기록에다가 살을 붙이고 빼는 방식으로 의학을 꾸려나간 것 같다. 효험이 좋으면 나만의 의술이 옳았다고 주장하고, 효험이 없으면 당대 의학의 정보가 잘못됐거나 환자가 잘못됐다고 여기니, 의학이 호감을 사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학문이 지지를 얻으려면 내부적인 체계를 잘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통하는 언어를 써야 하고, 모두가 납득할 논리를 써야 하며,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인정받을 실천을 보여야 한다.


물론 절대적으로 옳은 하나에 수렴하기는 어렵다. 몽테뉴도 마지막에 "견해들의 가장 보편적인 성질, 그것은 '다양성'이다."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다양성 속에서도 옳고 그름은 구분되기 마련이며, 옳고 그름을 견줄 수 없다면 '좋게 보임'과 '덜 좋게 보임'이 구분되지 않겠는가. 이론은 설득력을 갖춰야 하며, 설득력은 논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당대 의학의 실패가 주는 교훈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몽테뉴가 결석증을 치유할 수 없다고 실의에 빠진 것 같지는 않다. "어느새 이 결석증과 어울려 사는 삶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나를 위안할 거리도 찾고 희망도 찾는다. 인간이란 자기의 비참한 존재를 그다지도 애지중지하기에, 아무리 혹독한 조건인들 그 안에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받아들이지 못할 게 없다!" "적어도 나는 내 결석증에서 한 가지 이득은 끌어낸다. 죽음과 화해하고 친해지기 위해 내가 아직 스스로는 하지 못했던 것을 그것이 해주리라는 것이다." 여러모로 몽테뉴다운 발언이다. 삶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좋은 조건만큼, 어쩌면 좋은 조건보다 더 많이 악조건을 내밀곤 한다. 그러나 그것마저 껴안고 살아야 최선의 삶이 된다. 철학은 악조건 속에서 도피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악조건을 껴안고 살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살려고 배우는 것이지 '그런 체'하기 위해 배우는 게 아니다." 몽테뉴의 태도를 긍정이라고 봐야 할지 체념에서 우러나온 냉소라 봐야 할지는 애매하다. 하지만 삶을 겨냥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그 태도 자체가 존경스럽다.


마지막 부분에 편지가 하나 나온다. 몽테뉴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기술과 내 솜씨는 나 자신을 가치있게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나는 내 모든 노력을 내 삶을 만드는 데 바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직업이요 내 업적입니다." 철학으로 세상을 구하느니, 세상을 바꾸느니 하는 말은 멋있다. 하지만 내가 누리지 못할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내 시각을 바꿔서 세상을 살만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철학의 목표이다.


이것으로 「에세 2」에 실린 글들을 완독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장 탁월한 남자들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