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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와 도리에 관하여

「에세」 95

by 루너

말하기에 앞서, 나는 이번 글 제목의 번역이 마음에 든다. 반의어인 '실리'와 '도리'를 쓰면서도 '리'를 이용해 운율을 자아낸다. '이로운 것과 정직한 것에 관하여' 같은 제목보다도 낫다고 본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다. 본론으로 넘어가자면, 우리는 실리와 도리를 놓고 자주 갈등한다. 분명 양심은 도리를 가리키지만 상황은 실리를 가리킬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일단 실리를 택했다고 해서 함부로 비난하기는 어렵다. "자연 안에서는 그 무엇도 불필요한 것이 없다." 배신도 자연의 것이다. 배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들이 있다. 특히 국가 규모의 중대사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도리를 부수적인 것으로 밀고 실리를 추구하라는 마키아벨리의 과감한 충고가 아직까지도 고평가받는 이유가 분명 있다. 그러나 도리를 저버리고 실리를 택한 쪽을 마냥 칭찬하기도 어렵다. 국가를 위해서는 정의이다. 다만 사악한 정의이다. 몽테뉴는 아예 "사악한 정의란 다른 것 못지않게 자기 스스로에 의해 상처받는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몽테뉴는 차라리 양심에 솔직해지고 도리를 따르라고 권한다. "순수한 솔직함과 진실함은 어떤 시대든 여전히 기회를 갖고 통하는 법이다." 실리와 도리가 갈등한다고 해서 어떤 쪽도 취하지 않는 사람들은 미적거리다가 기회를 엿보는 사람이라 비난받을 수 있다. "그것은 중도를 가는 것이 아니며, 어떤 길도 가지 않는 것이다. 운이 붙는 쪽으로 줄을 대려고 판세를 엿보는 식이다.(티투스 리비우스)"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과감히 고르면 마음은 편하다. 먼 나중의 결과가 과연 중요할까? "나는 행동하면서 행동 그 자체 말고 다른 과실을 추구하지 않으며, 먼 나중의 결과와 목적을 거기에 연결시키지도 않는다. 각 행동마다 저 나름의 한 판 시합을 하는 것이니, 그럴 수 있다면 매번 과녁에 딱 맞히게 되기를!" 결국 자기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충실하게 가는 것이 목적이어야지, 행동의 결과를 계산하는 순간 이미 양심적이라는 평판에서 벗어난다.


사실 말이야 쉽지만, 나는 몽테뉴처럼 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결코 행동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좋은 명분이 있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양심을 후회할 것이다. 몽테뉴는 단호히 말한다. "이해관계와 사적 정념에서 비롯한 모질고 가혹한 마음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듯, 의무라고 불러서는 안 되며, 사악하고 배신하는 행위를 용기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그들을 끓어오르게 하는 것은 대의가 아니라 이해관계이다." "어떤 행위의 명예로움과 아름다움을 그 실리를 내세워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며, 유익한 것이면 누구나 그것을 행해야 하고 누구에게나 명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셈이다." 그러나 당장 그것들을 의무와 용기라고 부를 수 없더라도, 도박에 성공하면 그것들에게 그런 칭호를 억지로 붙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외치던 자들이 결국 혁명가 칭호를 잠시 달았듯이.


그러니 가장 좋은 방책은 그런 상황에서 결정적인 위치에 자리 잡지 않는 것이다. 즉 결정권자도 중역도 맡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최선이다. 이런 사람들은 역사에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역사에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몽테뉴도 공적 이익을 위해서 그런 일을 허용해야 할 때가 있음을 인정한다. "어떤 사적 이익도 우리의 양심을 거스르는 이런 일을 하기에 마땅치 않다. 공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도 아주 분명하고 아주 중요할 때만 그렇다." 그러면 공적 이익과 자기 손이 무관한 처지라면 얼마든지 양심대로 살아도 될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덕의 권리는 우리 의무의 권리보다 우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런 것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프로페르티우스는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절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높은 중역의 자연스러움과 낮지만 자유로운 사람의 자연스러움은 다르다. 몽테뉴 또한 스스로를 후자에 속하는 행운을 누린 자라고 자평했으니 이런 주장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후자에 속하여 고민 없이 살고 싶다. 몽테뉴가 역사에 영향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만인의 사상에 영향을 준 사람이 됐듯이, 자유로움 속에서 오히려 꽃 피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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