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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에 관하여

「에세」 96

by 루너

나는 「실리와 도리에 관하여」를 읽고 몽테뉴의 태도를 본받고 싶어졌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덕행을 하고 후회한다면 도리를 저버리고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후회에 관하여」를 읽으니 내가 '후회'라는 감정에 대해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분명 악덕은 잘못된 것이다.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악덕을 괴로워한다. "악덕을 알고도 미워하지 않기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사악함은 그 자체의 독 대부분을 들이마시며 스스로 그 독에 오염된다. 악덕은 궤양이 살에 흔적을 남기듯 영혼에 회한을 남기며, 이것은 줄곧 스스로 상처 내고 피를 흘린다. 왜냐하면 이성은 다른 슬픔이며 괴로움을 지워 주지만 회한의 슬픔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은 내면에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괴롭다." 그러니 악덕을 알고도 저지르는 사람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더 큰 고통을 굳이 느끼는 셈이다. 사건의 결과는 나타나면 그걸로 끝이겠지만, 사건을 겪고도 살아가는 나의 마음은 평생토록 나를 쫓아다닐 것이다. 더구나, "덕스런 행동의 보상을 타인의 인정이라는 토대 위에 세우는 것은 그 기초가 너무 불확실하고 흔들린다." 보기 좋은 것을 추구하면 진정 좋은 것을 놓치기 마련이다. 양심과 처세 중 어느 한쪽에만 무게를 두어야 한다면, 양심에 기대는 것이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오히려 안정적이다.


몽테뉴는 후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후회란 우리의 의지를 부인하는 일이요, 상념들의 변덕일 뿐이며, 그것은 우리를 온갖 방향으로 끌고 다닌다." 우리의 의지, 즉 양심대로 한 것을 후회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고, 양심대로 하지 않은 것은 애초의 후회의 대상이 아니다. 저번 글에서 내가 보인 태도처럼 우리가 결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몽테뉴의 시각에서 우리는 애초에 양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양심보다 공명심 때문에 절호의 기회에 대비한다. 영광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은 우리가 영광을 위해 하는 일을 양심에 의해 하는 것일 텐데 말이다."


몽테뉴는 한 도둑의 예를 든다. 그는 젊었을 적 도둑질로 생계를 꾸렸다. 나이가 들고 형편이 안정되자, 그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지운 빚을 갚고 있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최근에 뉴스에 보도된 사건이 생각났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훔쳤던 사람에 수십 년 만에 책값을 백만 원으로 갚았고, 이에 감화된 교보문고 측이 여기에 돈을 더 얹어서 기부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몽테뉴는 도둑 이야기를 이렇게 평했다. "그에 대해 정말 뉘우치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 죄를 이처럼 상쇄시키고 보상하고 있는 한 그는 후회가 없다. 이것은 우리를 악덕에 동화시키고 우리의 판단력 자체를 거기에 순응하게 만드는 저 습관과는 다르며, 갑자기 몰아치면서 우리 영혼을 줄곧 혼란시키고 눈멀게 하며, 지금 우리를, 판단력과 그 모든 것을, 악덕의 권능 속으로 휘몰아가는 저 격렬한 바람과도 다른 것이다." 잘못된 것을 알고 실제로 고치고 있다면 애초에 후회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사람을 배신할 것인가, 자신의 의지를 배신할 것인가? 자신의 의지는 그때그때 최선의 판단을 내린다. "내 행동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과 내 처지에 맞게 조절되고 부합된다. 나는 그보다 더 잘할 수는 없다. 후회란 원래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과는 관계없다. 애석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 운수를 탓하지 내 직업은 아니다. 이것을 후회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결과가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의지 축에도 못 낀다. 물론 몽테뉴는 의지가 변하는 경우, 즉 정신에서 명민함이 빠져나가는 경우를 인정한다. 늙을 때이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 전에는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다. 몽테뉴처럼 철학으로 수행하고 있다면 그 속도마저 늦출 수 있다.


몽테뉴는 늘 자신을 비롯한 인간의 판단이 일관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몽테뉴는 서두에서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그 추이를 그린다. 만일 내 영혼이 고정될 수 있다면 나를 시험해보려 하지 않고 마음을 결단하리라. 그러나 내 영혼은 늘 수련의 과정, 실험의 과정에 있다." 그러나 몽테뉴에게 일관된 부분이 결국 있으니, 의지가 시기에 따라 달라질지언정 자신의 의지에 계속 충실하다는 것이다. 그는 독자를 기만하지 않는다. 그가 일관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그의 변덕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의지가 모종의 사유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의 굳은 결의가 드러나는 문장을 보자. "내 생각에는 인간의 행복을 만드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행복하게 죽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내보이고 또 그렇게 비치기를 바란다. 내가 다시 살게 된다면 나는 내가 살아온 것처럼 다시 살 것이다. 나는 과거를 한탄하지도 않으며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나는 후회를 결과에 매달아두었고, 몽테뉴는 후회를 양심에 매달아두었다. 양심 때문에 괴로울 것이라고 운운하면서 결과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하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모순을 만드는 셈이다. 몽테뉴의 따끔한 지적은 내 정신을 깨웠다. 나는 소극적인 처지를 여전히 선호하겠지만, 어떤 자리에 있어도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그때그때 충실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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