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97
혼자서 누리는 지혜는 주머니 속의 원석과도 같다. 사람들과 교류하며 세공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스스로 가치를 깎아먹게 되니 말이다. 좋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사귐은 하나의 의무이다. 자기 자신의 세계에서만 먹히는 생각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생각이라도 독단이다.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의견들을 만나야 한다. "자기 기질이나 성향에 너무 강하게 붙들려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주요한 능력은 다양한 일에 적응할 줄 아는 것이다. 가장 고매한 영혼은 가장 많은 다양성과 유연성을 지닌 영혼이다." "삶은 고르지 않고 불규칙하며 다형적인 움직임이다. 자기 모습을 끊임없이 따라가기만 하고, 자기가 가진 경향에 너무 얽매여 그로부터 거리를 두지도 그것을 고치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벗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주인은 더욱 되지 못하고, 자신의 노예가 될 뿐이다."
우리는 사귐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사귐이 모든 형태의 사귐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겉치레에 불과한 만남은 이익이 없다. 서로 지식을 뽐내는데 치중하고, 신분에 맞는 형식을 공허히 추구한다면, 남에게서 얻을 것도 없고 내게서 새로 만들 것도 없다. 정신을 낮추고 편히 쉬게 하는 관계가 오히려 이상적이다.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말했듯, 결국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이 최고로 좋은 경지이다.
그러므로 몽테뉴는 인생을 위한 세 가지 사귐을 제시한다. 첫째는 고결하고 유능한 이들과의 사귐이다. 즉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이 교류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이런 교제의 목적은 그저 무람없이 지내는 것, 자주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열매를 기다리지 않고 영혼을 수련하는 것이다." 어떤 주제를 잡고 얘기하든지, 늘 우아함과 적절함이 깃든다. 왜냐하면 나와 내가 교제하는 사람 둘 다 성숙하고 변함없는 판단력을 추구하며 모든 것에 선의와 솔직함과 명랑함과 우정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사귐이다. 영혼의 이익은 우정만 못하지만, 이 관계는 몸을 만족시킨다. 몽테뉴는 육체를 사랑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나는 임신 없는 모성을 생각할 수 없듯이 큐피드 없는 비너스를 생각할 수 없다. 이 둘은 서로 그 본질을 상대에게 빌려주고 빚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주로 보고 만지는 것과 관계되니, 정신의 우아함이 없더라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지만 육체의 우아함 없이는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육체가 영혼을 압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육체의 방종은 육체에게도 영혼에게도 좋지 않을 테니 말이다.
셋째는 책과의 사귐이다. 책의 이로움은 굳이 해설할 것이 없다. 물론 책은 육체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고, 책이 곁에 있어도 읽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안심을 준다. "책은 나의 행로 어디에나 내 곁에 있으며 어디든 나를 동반한다. 책은 항상 같은 얼굴로 나를 맞아 준다." 책은 작가의 정신을 자신에게 보여주면서도 독자에게는 혼자서 숨을 돌릴 여유를 제공한다. 책과 함께 하는 삶이 복받은 삶이다. 책으로부터 어떤 것을 탐구하지 않으면 어떠랴. "나는 하루하루를 산다. 그리고 언짢게 생각하지 말기를 바라지만, 나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 내 목표는 거기까지가 전부이다. 젊을 때 나는 과시하고 싶어서 공부를 했다. 그 뒤에는 얼마쯤,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고 공부했으며, 지금은 소일거리 삼아 재미로 공부할 뿐, 탐구하고자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고 책꽂이에는 좋은 책이 빼곡하다. 특히 지금은 책에 관해 말하는 몽테뉴의 책에 관해 말하고 있으니, 나는 시대를 초월한 우정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 사실이 굉장히 행복하고 자랑스럽다. 그러나 두 번째 유형의 사귐은 아직 누리지 못해보았고, 솔직히 앞으로 누릴 일이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이 불안함이 확신이 된다면 첫 번째 사귐과 세 번째 사귐에 더욱더 안겨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