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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기술에 관하여

「에세」 102

by 루너

이번 글은 언뜻 보면 데일 카네기 같은 작가들이 쓸법한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대화의 기술'을 전수하는 글로 보이지만, 그런 글과는 거리가 멀다. 몽테뉴가 늘 다루는 주제처럼 자신에게 좋은 대화와 자신에게 해로운 대화를 구분해서 보여줄 뿐이다. 몽테뉴는 "내 생각에 우리 정신의 가장 비옥하고 자연스러운 훈련은 대화이다."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아무 대화나 그 정도의 가치를 매길 수는 없다.


몽테뉴는 대화를 할 때 분별을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대화를 가장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동조하는 것이다." 내 의견을 확인할 뿐이거나, 상대의 의견에 동조할 뿐이라면, 대화를 통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다. 상대의 반박을 듣고 나는 이를 다시 반박하며 진리에 한 발 다가가는 과정이 대화의 핵심이다. 그래서 몽테뉴는 이상적인 대화로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든다.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이라는 대화법으로 유명하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결론을 미리 정해두고 상대에게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도리어 상대의 앎을 무효한 것으로 드러내어 자신과 상대의 무지를 동시에 폭로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런 대화법은 물론 자존심을 긁는다.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환영받지 못했던 이유가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판단은 충돌로써 깨어난다. "사람들은 반대 의견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정당한지를 눈여겨보지 않고, 옳게건 그르게건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갈까를 궁리한다." 알량한 자존심이 마음을 확장하는 일을 방해한다면 자존심은 없느니만 못하다. 그러므로 대화에서 요구되는 유일한 기술은 솔직함이다. 자신의 의견을 그대로 내비치고, 상대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둘이 내면에서 반응하여 내뿜는 화학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 대화의 목적이다.


권위에 복종하는 대화를 지양해야 한다. 사람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지혜라기보다 행운이기 때문이다. 플라우투스는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이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행운의 힘에 의한 것, 그가 떠오르니 우리는 모두에게 그의 유능함을 선언하게 된다." 현대에도 비슷하고 유명한 말이 있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당신이 똥을 싸도 사람들이 박수를 쳐줄 것이다."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도 누군가는 지배자가 되고 누군가는 빛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일은 역사에서 유서 깊은 일이다. 공자가 말했다고 해서 절대로 옳은 말은 아니며, 플라톤을 인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수준 높은 말은 아니다. 오히려 겉만 번지르르한 말은 마음에 어떤 울림도 주지 못할 우려가 크다. 우리는 말을 인용하거나 말을 판단할 때 말하는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말 자체의 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대화에 반성을 결여해서는 안 된다. "우리 눈은 뒤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리는 우리 이웃 이야기를 하며 사실은 우리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가 되는 점을 놓고 비난할 때 우리의 판단력이 자신에 대한 심판에서 스스로를 면제해 주지 않아야 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몽테뉴는 독자와 이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나 자신이 일어선 모습과 누워 있는 모습을, 앞쪽과 뒤쪽을,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을, 내가 타고난 모든 경향 속에서 제시한다." 몽테뉴는 수많은 현자들의 어록을 인용하면서도 그들의 권위에 계속 도전하고, 자신을 포함한 인간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 한다. 그래서 「에세」에 아직까지도 생명이 깃들어 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대화에서 얻어 가는 바를 생각하기로 했다. 공감은 나를 기쁘게 하지만 나를 발전시키지는 못한다. 상대에게도 그럴 것이다. 물론 공감하는 바를 억지로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공감의 논거를 꼼꼼히 따지며 나의 판단과 남의 판단을 저울질해 더 옳다고 생각되는 쪽을 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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