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헛됨에 관하여

「에세」 103

by 루너

오늘 읽은 글은 지금까지 읽은 「에세」의 모든 글 중에서도 가장 유익했다. 몽테뉴의 인간다운 면모를 볼 수 있어서 좋았고, 몽테뉴가 던진 조언들 중 와닿는 것들이 정말 많았다. 제목을 보았을 때는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해서 내 인생의 의미를 박탈하면 어쩌나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몽테뉴는 그러지 않았다. 몽테뉴는 인생의 헛됨도 다루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든 자기 좋을 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는 헛됨을 더 중요하게 다룬다.


사람은 미물이다. 인정하기 싫더라도 우주 전체에서 인간은 미물이다. 아무리 지구의 현대에서 위대한 사람이라 해도 죽음과 자연 앞에서는 평등하게 약하다. 그러나 이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말하자면 우주와 싸우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일반적인 것으로써, 또 보편적인 원인과 과정을 따지느라 우리 생각을 어지럽히는데 이것들은 우리 없이도 너무나 잘 운행되어 가는 것들이다. 우리는 인간 자체보다 더 가까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우리 자신의 행위와 나, 미셸은 저 뒤에 내버려 두고 있다." 나는 몽테뉴의 말에 첨언해서 우주를 탐구하는 일이 헛되지 않다고 강조하고 싶다. 우주를 탐구하는 일은 곧 자기가 사는 세계에 자신이 바라거나 바라본 세계를 투사해서 삶의 기틀을 다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해볼 수 없는 커다란 문제에 집착해서 정작 중요한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실수이다.


우주까지 갈 것도 없다. 나라만 해도 그렇다. 선거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구태를 지적하며 혁신해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그런데 정말 새로운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일까? 몽테뉴가 보기에, "인간 사회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유지되어 가고 얽혀 돌아간다." 어떤 규범을 세우더라도 그 틀 안에서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몽테뉴는 그간 은근히 피력했던 보수적인 견해를 이번에 확실히 내비친다. "뛰어난 최선의 정치 체제는 어느 나라에나 지금 그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체제이다. 그 모습과 본질적 이점은 관습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못마땅해한다. 그러나 민주 국가에서 소수의 지배를 혹은 왕정 체제에서 다른 종류의 정부를 계속 희구한다는 것은 오류이고 얼빠진 생각이다. 혁신만큼 한 나라를 짓밟아 놓는 것은 없다." 나는 이 말에 무조건 찬성하지는 않는다. 국가 구실을 전혀 못 하고 있는 소말리아 같은 나라들이 실존하기도 하고, 어쨌든 우리는 개선을 목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테뉴의 견해는 분명 일리 있다. 그때그때 입맛에 맞게 나라를 뜯어고치면 존속되는 정책이 없다. 오히려 나라를 불안정하게 만들 우려가 크다. 어쩔 수 없는 문제를 정치인, 혹은 민중의 근시안적인 입맛대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달려들다가는 나라가 호되게 데일 수도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신들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각자가 그렇게 중요한 존재라면 인생이란 정말 피곤한 짐이다.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이 당신을 필요로 하고 당신과 관계되는 곳에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누구도 옹립하지 않은 왕이 되어 민중들의 눈치를 보고 자신을 파괴하는 격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중의 의견에 맞는 모습을 보이고자 우리 자신의 장점을 스스로에게서 빼앗아 버린다." 심지어 죽고 나서 남을 자신의 이름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명성을 가공하는 괴테를 그린다. 거기서 괴테는 자신의 행적이 어떻게 해석될지, 오해받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사후에 어떤 식으로 남을지는 기록자에게 달려있으니, 결국 「불멸」에서 괴테의 걱정은 헛된 것이다. 몽테뉴도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는 이들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항상 사실과 다르게 이야기한다. 잃어버린 내 친구(라 보에시)를 내가 온 힘을 다해 지켜 놓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그를 내게서 빼앗아 수백 가지 반대되는 모습들로 찢어 놓았을 것이다."


허무로 가득한 인생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몽테뉴는 한 문장으로 삶의 지혜를 전수한다. "세상만사 그때그때 따져 보고 고쳐 쓸 일이다." 어차피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없다. 자신의 이성을 잘 닦아두었다 하더라도 사건 앞에서 이성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그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러나 욕심부리지 않고 소박하게 살자. 인생 전체를 통해 장황한 견해를 만들 의무는 없다. "유익하고 기분 좋은 견해라면 그것은 충분히 진실하고 건강한 것이다." 물론 지켜야 할 규칙까지 무시하고 막 살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가 정의와 법에 의거해 살아야지 보상이나 호의에 의해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원칙은 정해져 있다. 여기에 자발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행동에서 어딘가 자유의 찬란함이 비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훌륭하지도 명예롭지도 않다." 결국 인생의 헛됨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인생의 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그저 그대 자신의 됨됨이를 다시 만들라. 왜냐하면 바로 그 됨됨이 안에서 당신은 무엇이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허무를 받아들이는 좋은 방법으로 여행을 권한다. 늘 반복되는 일상, 늘 마주하는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우선 자신과 늘 가까워서 가치를 못 느꼈던 것들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당신의 나날의 즐거움을 손으로 꼽아 보라. 당신은 당신 친구가 옆에 있을 때 당신 친구를 더 잊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니면 더 마음에 드는 것을 배우고 좋은 기분으로 돌아올 수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더라도 자신의 안에 있던 생각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공간이 서로 분리되면 우리 의지의 결합은 더 풍요로워진다." 몽테뉴가 책으로 시간을 여행해서 현자들의 좋은 글귀를 얻어 오듯이. 여행이 소모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행지에서 좋은 꼴만 본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어디로 가면 그대를 가로막고 괴롭히는 것을 안 만나리라 생각하는가? 쿠르티우스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운명의 호의는 결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그대를 가로막는 것은 그대밖에 없다는 것을 알라."


새로움을 만나는 일, 다양성의 즐거움을 누리는 일 자체가 여행의 목적이다. 결국 운명이 선물을 줄지 저주를 줄지 모른다면 일단 운명에 몸을 실어서 결과를 수용하면 될 일이다. "삶은 우리의 지혜와 상관없다. 운명이야말로 우리 삶의 키잡이리니." 몽테뉴는 여행의 태도를 이렇게 요약한다. "오른쪽 날씨가 궂다 싶으면 나는 왼쪽으로 간다. 말을 타고 가기에 어렵다 싶으면 길을 멈춘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나는 진실로 어디나 내 집만큼 쾌적하고 편안하지 않은 곳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과잉된 것을 과잉이라 여기며, 섬세한 것마저도, 그리고 풍족한 것도 거북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인가 봐야 할 것을 두고 왔다 싶으면? 나는 그리 돌아간다. 그것도 역시 나의 여정이다. 나는 곧은 길이건 굽은 길이건 어떤 길도 미리 확정해 두지 않는다. 내가 가는 길에 사람들이 이야기해 준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판단이 내 판단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그리고 그들의 판단이 틀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므로 나는 헛수고였다며 아쉬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하던 것이 그곳에 아예 없다는 사실을 내가 배운 것이다." 여행은 수용의 훈련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의 손익이 아니라 자유를 체험하는 것이다.


결국 헛된 일을 극복하려는 헛된 일보다는 헛된 상황 속에서 챙길 수 있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서 몽테뉴는 집안 살림과 여행을 강조한다. 나도 이 지적을 듣고 나니 정치 문제에 골몰해서 잠을 못 이뤘던 경험이 생각났다. 개인적으로 지지하던 정치인에게 불리한 정황이 드러나서, 나라가 앞으로 어찌 될지 불안해했던 것이다. 그때가 벌써 수년 전인데 지금 생각하면 커다란 기우였다. 물론 그 사람의 정치생명은 거의 끝났다 봐도 무방하지만 나라는 어찌어찌 돌아가고 있다. 잘 돌아간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다른 나라도 우리만큼 지지부진하다. 나는 이 헛된 걱정을 차라리 내면으로 돌려야 했다. 내 이상과 너무 다른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에세」가 그 단서를 주었다. "기쁨은 확장시켜야 하지만 슬픔은 가능한 한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안으로건 밖으로건 너에게는 늘 헛됨뿐이지만 외부로 덜 뻗으려 할수록 그 헛됨은 줄어들리라."


나는 이제 소박하게 살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들을 좇되, 그것이 내게 보람보다 허무를 느끼게 한다면 나는 바로 그만둘 것이다. 내 분에 넘친다 싶으면 나서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탓하기보다는 세상이 원래 이런 곳임을 인정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것이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외적 조건보다 내 힘으로 무한히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는 내적 조건에 집중할 것이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우주의 신비에 관심이 있고, 정치에도 관심을 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오롯이 내 것이 될 수 없다고 느껴지면 나는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지 않을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대화의 기술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