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기 의지를 조절하는 것에 관하여

「에세」 104

by 루너

이번 글은 저번에 다룬 「헛됨에 관하여」처럼 유익한 글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두 글 모두 분에 넘치지 않게 욕망할 것을 강조하니 두 글은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 다만 「헛됨에 관하여」가 인생을 위해 조언한다면 「자기 의지를 조절하는 것에 관하여」는 관계를 위해 조언한다.


몽테뉴는 늘 중용을 강조한다. "사람은 고통에 대한 혐오와 쾌락에 대한 사랑 사이 중간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쾌락을 얻기 위해, 또는 쾌락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몸을 해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권력에 골몰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침대까지 가져가 끙끙 앓는다.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삶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어야 하지, 나에게 기대를 품은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는 자기를 빌려주기만 해야 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자기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리가 가진 으뜸가는 책무는 각자 자기 자신을 이끌어 가는 일이다."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으로 재임했던 시절을 회고한다. 몽테뉴는 보르도에 극적인 변화를 주지 않았다. 본인이 보기에도 다소 미적지근한 시기였다. 다만 몽테뉴는 아무런 혼란이나 사고 없이 도시를 유지한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사람들의 입맛대로 과감한 시도를 했다면 분명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중의 판단이 늘 옳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역사에 남더라도 안 좋은 이름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있다. "모든 공적 행위는 애매하고 다양한 해석을 견딜 수밖에 없으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주기도문의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라는 구절처럼 도박으로 값을 불리는 인생보다는 극복할 시련 없이 정적인 삶을 선호했다. 이런 삶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기질에 따라 다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내향적이고 부담을 쉽게 느끼는 사람으로서 몽테뉴의 심정에 동감한다. 영웅처럼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들이 변화를 일으키게 두자. 다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처지에 적절한 즐거움들이 있다."


몽테뉴가 무조건 소박하게 살라고 명령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을 돌아보고 한계를 그으라고 조언할 뿐이다. 이 한계가 확고부동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니 한계선도 점점 넓어질 것이다. 사람이 최종적으로 이르는 경지가 영웅일지도 모른다. 몽테뉴가 「헛됨에 관하여」에서 여행을 강조한 것도 사람의 한계를 연장할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다만 선 너머가 안전하다고, 자신에게 어울리다고 밝혀지기 전까지는, "우리 욕망의 무대는 가장 손쉽고 바로 인접해 있는 즐거움들의 좁은 테두리 속에 제한되고 한정되어야 한다. 더욱이 그 궤도는 다른 어딘가에서 끝나는 직선이 아니라, 출발과 도착의 두 지점이 짧은 윤곽을 그리며 우리 내부에 자리하고 거기서 종결되는 곡선이라야 한다."


흔들리는 삶을 버틸 자신이 없으면 흔들림을 피하자. 어차피 만사는 내 뜻을 떠나 흔들리게 돼있다. "일의 처음에는 그것을 이끌어 가고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이 우리이지만, 나중에 일이 일단 시작되고 나면 일 자체가 우리를 이끌고 휩쓸어 가니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과에 열을 올리지 말고, 시작한 일은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게 놔두자.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해 좀 더 절제된 태도를 갖는 사람은 항상 제 집에 있는 듯 평정을 지킨다." 이것이 몽테뉴가 두 개의 글에 걸쳐 나에게 던지는 뜻깊은 조언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헛됨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