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105
옛 이탈리아인들은 절름발이 여인이 밤일 상대로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체의 뒤틀림 때문에 영양 공급이 안 되어 생식기가 발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주장이 틀린 것을 넘어 우습다는 것을 안다. 절름발이는 혈관의 막힘이 아니라 골격의 뒤틀림이기 때문에 영양 공급에는 문제가 없다. 사람은 환상박피로 체관을 끊으면 영양분이 가로막히는 식물과는 다르다. 그러나 당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다. 몽테뉴는 천박한 정복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붙인 근거라고 추측한다.
이렇듯 우리가 확신하는 것들이 시대가 지나면 틀린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흔하며, 어떤 경우에는 틀린 것을 넘어 우스꽝스럽고 비참한 지경까지 추락하기도 한다. 몽테뉴는 테라메니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이 사람은 두 개의 다른 의견을 놓고 끊임없이 저울질했는데, 그 때문에 "양쪽을 골고루 살펴보는 당신은 신발도 양쪽 발 모두에 맞겠다."라는 의미에서 양쪽 발 모두에 맞는 신발을 가리키는 '코투르누스'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몽테뉴는 테라메니스의 일화를 들려주며 우리의 이해력을 이렇게 판단한다. "우리의 이해력만큼 유연하고 제멋대로인 것도 없다. 그것은 양쪽 발에 다 맞는 테라메니스의 신발이다. 우리 이해력도 모호하고 다면적이며, 사물도 모호하고 다면적이다."
몽테뉴는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에 이어서 이번 「절름발이에 관하여」를 통해 회의주의를 강조한다. 사물도 확실한 것이 없고, 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판단력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논지다.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는 무지를 고백해야 한다. 놀람은 모든 철학의 기초이며, 탐구는 그 과정이며, 무지는 그 결말이다." 회의주의의 장점에 대해서는 「레몽 스봉의 변호」에서 충분히 다뤘으니 넘어가고, 대중의 판단에 대해 좀 더 다루기로 한다.
정보 혁명 이래로 정보량은 넘치는데 사람들은 정보의 진위를 구분하지 못한다. 빠르게 퍼지는 가짜 뉴스에 사람들은 현혹되어 추태를 저지르고는 한다. 요 근래 어떤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번갈아가며 바뀐다. 정보가 다 드러나지 않았어도 자신의 정의대로 판단을 내리고 심판을 하려는 대중의 습성 때문이다. "진실과 허위는 얼굴도 비슷하고, 태도나 맛, 거동도 닮아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런 순환은 물론 해롭지만, 사람들은 이 순환이 잘못된 것을 알더라도 쉽게 현혹되고는 한다. 다중의 판단은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느 순간 추측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개인적 오류가 공중의 오류를 만들지만 나중에는 공중의 오류가 제 차례가 되어 개인의 오류를 만들어 낸다." 자기만의 생각으로 그친다면 모르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믿게 되면 그것을 남에게 설득시키는 것이 자선 행위라 생각한다." 그래서 문제는 자주 심각해진다. 대중의 정의롭고 설익은 음해로 목숨을 끊은 연예인들도 제법 많다.
우리는 여전히 마녀를 사냥한다. 예전보다 악독해진 점이 있다면 사람의 이 습성을 이용하는 선동꾼들이 득세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우리의 난점을 파악하고 자신들의 견해를 믿게 하는데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이 세상의 모든 속임수는 우리의 무지에 대해 고백하기를 우리가 두려워하도록 세상이 가르치기 때문에, 그리고 반박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도록 우리에게 강제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괴벨스는 죽은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나아진 것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이론은 '제가 알기론'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물론 건전한 사회를 이끌기 위해 모두가 믿는 정설이 필요하기는 하다. 플라톤이 도덕 개념들을 흠 없이 정의하려고 평생에 걸쳐 애썼듯이 말이다. 하지만 플라톤도 찾지 못했고 우리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 찾을 생각이 있는지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대중에 영합하려는 지식인을 지식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들은 진정 지혜롭다기보다는 쇼맨십이 뛰어날 뿐이다. 대중과 별개로 자신만의 탐구 과정을 거쳐서 지식을 뽑아내는 사람만을 인정하고 싶다. 나아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이다. 사람은 사람 없이 살 수 없는데, 사람은 사람 때문에 바보가 된다. 우리는 정말 역설적인 운명을 타고났다. 우리는 두 다리가 멀쩡해도 앞사람이 다리를 절으면 그것이 옳은 걸음인 줄 알고 따라 하며 다른 사람도 그렇게 걷기를 권하는 절름발이들이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면 자신이 옳다는 확신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점점 내려놓고 다리를 가볍게 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