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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에 관하여

「에세」 106

by 루너

몽테뉴의 시대는 정말 어려운 시대였다. 내전과 외적과 빈곤이 나름 높은 신분이던 몽테뉴까지 직접 괴롭혔으니 말이다. 한 번은 흑사병이 돌 때 몽테뉴가 민중을 볼 일이 생겼는데, 이 경험이 몽테뉴를 놀라게 했다. 민중들은 흑사병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자기 삶을 살고 있었다. 이 경험이 이 문장을 만들었다. "땅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저 가난한 이들을 보라. 머리 숙인 채 땀 흘려 일하는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도 카토도 본보기도 교훈도 모른다. 대자연이 지어 준 대로 그들은 매일, 우리가 학교에서 그토록 공들여 배우던 것보다 훨씬 더 온전하고 굳센 꿋꿋함과 인내의 실행을 이어 가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외모가 있다. 외모는 사람이 아니라 개념에게도 존재한다. 죽음은 무서운 외모를 갖고 있으며, 지혜는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믿듯이 외모는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외모는 허약한 보증이다." 분명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외모가 필요하다. 그러나 끌어모은 사람들을 모아 아름다운 일을 해내려면 아름다움에 대한 분별이 있어야 한다. 어떤 현인의 말을 본받겠다며 그를 무작정 인용하고 따라 하는 것은 현인의 외모에 끌린 것과 다를 바 없다. 애석하게도 그런 경우가 정말 많지만 말이다. "우리가 가진 견해라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권위에 기대어 그리고 남들이 그러더라는 이유로 받아들인 것들이다."


우리는 내면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특히 자신의 내면을 보는 눈이 중요하다. 외부의 풍파에 휩쓸리더라도 자신의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역경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커다란 목표이다.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 나 자신과 나의 역경을 나 스스로에게 맡기는 것이었으며, 설혹 운명의 여신이 어쩌다 나를 차갑게 대한다 하더라도, 나에게 매달리고 더욱 가까이 나를 향해 서면서 더욱 강하게 나를 나 자신의 호의에 의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면 죽음은 시야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어차피 사리는 대자연이 결정하는 법이다. "대자연은 그에게 오직 죽는 순간에나 죽음을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목소리대로 행해야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산다고 말할 수 있다. 호라티우스는 이를 두고 멋진 문장을 지었다. "폭풍이 나를 어떤 해안에 던져 놓던지, 나는 그곳에 발을 딛는다."


몽테뉴는 만년에 병들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담담했다고 한다. 병이란 인간을 삶에서 떼어놓기 위해 자연이 마련해 놓은 부드러운 방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몽테뉴가 자객에게 습격을 당한 일도 있었는데, 이럴 때 몽테뉴는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자신이 늘 견지하던 태도를 지키려 노력했다고 한다. 이에 감명받은 자객들이 몽테뉴를 풀어주었다. 몽테뉴의 비결은 단 한 가지이다. 그는 어느 상황에서든지 그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라는 책의 큰 줄거리를 생각했다. 사건들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마저도 그렇다. "죽음은 삶의 끝이지 삶의 목표가 아니다. 삶이야말로 삶 자신의 과녁이자 목적이어야만 한다. 삶을 올바르게 배운다는 것은 스스로를 규율하고 스스로를 다스리며 스스로를 견디는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기도문이 이번 글에 인용됐다. "그저 지금 내 소유인 것만을,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보다 적게라도 지켜 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신들이 여생을 허락한다면 남은 날들을 나를 위해 살 수 있게 되기를!" 지금까지 읽은 기도문 중에서도 으뜸이다. 몽테뉴가 소크라테스와 카토를 존경했지만 닮지는 못했듯, 나도 몽테뉴처럼 목숨이 위태로울 때 기개를 유지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게 자연스러운 쪽, 자연이 나를 설계할 때 반영한 점을 고려하여 처신하고 싶다. 한마디로 나의 뜻대로 살고 싶다. 오랜 소원이자, 「에세」를 읽고 강해진 소원이다. 이번 글도 정말 감격이 차오르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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