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107
세상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법칙이 있을까? 물리학에는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겪는 사건들은 너무 다양해서 혼돈과도 같다. "삼라만상의 모습에 담긴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든다면 바로 다양성과 상이함이다." 삶의 모든 모습을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세상을 설명해 보고 개념들을 쪼개고 규칙을 세분화한다. 그러나 늘 새로운 것이 등장해서 새로운 반례를 포괄하는 새로운 설명을 만들 운명에 처해있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굴리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우리 삶은 늘 새로운 것을 제시한다. "우리의 삶이란 그저 움직임일 뿐이다."
삶의 유익함을 증대하기 위해 우리는 현인들의 말을 공부한다. 하지만 이런 공부의 귀감인 몽테뉴마저도 「에세」의 마지막 글인 이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키케로를 이해하기보다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 우리 자신의 삶보다 카이사르의 생애가 우리에게 더 본보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도움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삶과 내 삶은 궁극적으로 다르다. 어차피 사람의 삶인 점이 똑같다면, 그 사람들의 본보기가 그렇게나 두드러진다고 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선현의 철학을 공부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경험을 공부해야 한다.
나의 삶을 가장 잘 가르쳐 주는 것은 나의 경험이다. 경험은 내가 어떤 인물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한다. 내가 겪은 마음가짐이 다음에 취할 마음가짐을 가르친다. 선현의 철학에 감동해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교정하고자 할 수 있다. 나는 이 시도는 그 자체로 존중한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을 그다지 보지 못했다. 결국 남의 문장을 얼굴에 써놓는다 해도 얼굴의 주인은 나다. 결국 자연이 나를 만든 과정 그대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무탈한 삶이다. "자신을 가장 단순하게 자연에 내맡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이다." 특히 경험은 쌓이면 습관이 되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몸이 상황에 대비하게끔 한다. 훈련이라는 것도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해서 상황에 대처하게끔 하는 교육이 아닌가. 이렇듯 삶을 설명할 때는 이론이 필요하지만 삶을 살 때는 경험이 필요하다.
삶을 통해 몽테뉴와 내가 배운 것은, 삶에서 우리가 어찌해볼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고, 내 감정으로 공감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들을 껴안고 돌아간다. 그러므로 몽테뉴는 이렇게 가르친다. "피할 수 없는 것은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세상은 머리로 살 수 없다. "이 우주 안에서 나는 아는 것 없이 무심하게 세상의 보편 법칙에 나를 내맡긴다. 그 법칙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게 되리라. 나의 지식이 그 법칙의 행로를 바꿀 수는 없으리라." 불합리한 공간을 뜯어고칠 수 없다면 내가 적응해야 한다. 삶은 평생토록 지속하는 적응이다.
다만 사람들이 종종 저지르는 착각이 둘 있다. 첫째는 경험에 위계를 두고 저열한 쪽을 차별하는 것이다. 보통 육신의 쾌락을 저열한 것으로 보고 금욕 생활을 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쾌락 또한 자연의 선물이다. 물론 중독되면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을 멸시하고 무조건 피하는 사람은, 다른 의미로 미친 사람과도 같다. 몽테뉴는 삶으로부터 이런 교훈을 얻었다. "나는 우리 몸이 식탁 앞에 있는데 정신은 구름 속에 올라가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싫다. 나는 춤출 때 춤을 추고, 잠잘 때 잠을 잔다. 대자연은 어머니의 자애로움으로 원칙을 마련했으니, 우리의 필요를 위해 우리가 따르도록 해 놓은 행동들에 또한 즐거움이 곁들이게 만들어 두어서, 우리는 이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욕구에 의해서도 그리 이끌린다. 대자연의 이 같은 규칙들을 망가뜨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둘째는, 몽테뉴의 생각과는 다른 나의 생각인데, 자연의 범위를 착각하는 것이다. 몽테뉴 시대의 의술은 점성술을 반영하는 등 비과학적인 측면이 강했다. 몽테뉴가 의학을 혐오한 것도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과학, 혹은 과학을 배우고 쓸 줄 아는 능력 역시 자연이 인간에게 선물한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스티브 잡스의 죽음을 괴상망측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자연에게 몸을 내맡겨서 그렇게 됐다.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삶을 지속할 의지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가능한 치료의 쾌락을 거절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몽테뉴의 시대에는 잡스의 선택이 옳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마다 저마다의 올바름이 있다. 옛것, 불편함, 무위가 모두 자연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몽테뉴의 경험을 배우고 있는 나도 결국 몽테뉴의 경험은 몽테뉴의 경험일 뿐이기에 쓸모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읽고 공감을 표해도, 내 삶도 한참 설익어서 몽테뉴와 같은 관록으로 나와 그의 삶을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이렇게 변명을 해 본다. 독서는 간접 경험이다. 몽테뉴의 말을 읽은 경험이 내 삶의 다른 경험과 맞부딪혀서 내는 새로운 효과를 나는 기대한다. 분명 내 삶이 바뀌지는 않지만 세상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더 성숙해질 것으로 믿는다.
"우리의 탐색에는 끝이 없다. 우리의 종점은 저세상에나 있다. 정신이 만족해한다는 것은 스스로 모자라거나 지쳤다는 신호이다. 굳센 정신이라면 결코 자신의 한계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강한 정신은 항상 더 앞으로 나아가며 자기 힘의 한계를 넘어서 간다. 그것은 성취 가능성을 넘어 비약하려 한다." 나는 굳센 정신을 늘 원했다. 다만 이전까지는 그런 정신을 세상으로부터 독립한 것으로 생각했다. 어떤 감정에도 지배당하지 않고 어떤 연민도 느끼지 않는 삶을 동경한 것이다. 지금은 몽테뉴의 이 말을 믿는다. "가장 통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형식이야말로 가장 아름답다." "영혼의 위대함이란 위로 올라가고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기보다 자신을 가지런히 하고 자신의 한계를 설정할 줄 아는 것이다."
이것으로 「에세」의 마지막 글을 읽었다. 비록 나의 초상이 아닌 몽테뉴의 자화상이었지만, 내가 자화상을 그려야 하는 이유와 자화상으로부터 구해야 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역사 속 영웅처럼 될 수 없다. 나는 영원히 남을 철학자도 되기 어렵다. 다만 나는 내가 될 수 있다. 의도적으로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 의지대로 살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다. 분명 나의 삶이 화려하거나 모범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 살 수만 있다면, 삶이라는 먼 여정의 끝을 돌아봤을 때 나는 미련이 없을 것이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들을 건드려 보았고,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갔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을 준 몽테뉴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의 훌륭한 가르침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자기 존재를 충실하게 누릴 줄 안다는 것이야말로 절대적 완벽함이요 신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