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7권
고대 그리스에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라는 두 철학자가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끝없이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지만 없는 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생각할 수 없다는 논리로 있는 것이 없어지거나 없는 것이 있게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즉 변화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셈이다. 둘 중 어느 쪽이 옳을까?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사물로 만든 하나의 우주이며, 또한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는 하나의 신이요, 하나의 실체, 하나의 법칙, 그리고 모든 이성적 동물의 하나의 공동 이성, 하나의 진리이다. 물질적인 모든 것은 우주의 본체 속에 곧 소멸된다. 그리고 형상적(인과적)인 사물은 곧 우주의 이성 속으로 되돌아간다. 또한 사물에 대한 기억은 순식간에 시간 속에 묻혀버린다." 알쏭달쏭한 이야기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사물들은 변화무쌍하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언젠가는 소멸한다. 사람 또한 우주의 관점에서는 사물에 속한다. 그래서 사물들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대는 머지않아 만물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만물도 머지않아 그대를 잊어버리게 된다." 반면 관념들은 변하지 않는다. 이성이 부여한 질서는 변치 않고 일관되게 우주를 움직인다. 그래서 선악과 같은 관념에 한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친근하며 또 덧없다."
이 논리를 삶에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 변화 그 자체가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물들에 필연적이기 때문이고, 변화를 일으키는 이성의 원리가 일관적으로 이롭기 때문이다. "변화 없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유용한 것으로서 변화 없이 이루어진 것이 있는가?" 특히 죽음의 공포도 변화를 숙명으로 받아들일 때 극복할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집착은 허상이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로, 첫째 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는 적극적으로 변화를 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삶에는 한계가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순간, 즉 죽음이 언젠가는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우리는 이로운 일들을 많이 해둬야 할 것이다. 우주의 원리가 이성이라면, 우리는 우주에 기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목표, 즉 몸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류와 기만에서 벗어나 오직 우주의 유일한 목표만을 직시해야 한다. 이미 그것을 구현할 재료들이 도처에 흩뿌려져 있다. "그대에게 나타나는 것은 모두가 합리적인 미덕과 정치적인 미덕의 좋은 재료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변화시켜서 좋은 일에 써야 한다. 기술자가 기술을 써서 물건을 만들듯이.
셋째로,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만물이 변화한다는 말은 곧 만물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목표를 바라보더라도 다가가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걸음이 남들의 걸음과 다르다 해서 슬퍼할 이유가 없다. 매사에 내 이해력이 충분하다면 내가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기여하기 위해 다른 일을 찾아야 마땅하다. "그대 스스로 똑바로 서라. 그렇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똑바로 서 있어라." 나는 그저 나의 현재에 집중하면 될 뿐이다. "그대 자신으로 돌아가라. 그대 자신을 현재에 국한시켜라. 오직 그대 자신에게 집중하라. 그리고 그대의 모든 행위에서 선한 사람이 되겠노라 다짐하라. 언제나 이를 기억하라."
변화를 섭리로 받아들이면서도 변화 속에 지킬 목표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사물들을 관조적인 마음으로 동정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아우렐리우스의 우주론이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화를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가다듬는 아우렐리우스의 정신은 모두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