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31
이번에 읽은 글의 존재는 사실 「에세」를 읽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떤 다른 책에서 언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몽테뉴가 식인종을 나름 정당한 근거를 들며 지지했다는 얘기가 실려있던 것만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다. 그때도 자세한 얘기가 궁금해서 이 글을 언젠가 읽고 싶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오게 되어 기뻤다. 다만 몽테뉴의 논거가 내 생각과는 많이 달라서 놀랍기도 했다.
몽테뉴는 우선 식인종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그들이 사는 미지의 땅의 이야기를 전파하는 호사가들을 비판한다. 이들이 세계의 모습을 진솔하게 말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그들 스스로를 매력적인 인물로 보이게 하기 위해 가공을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그들은 MSG를 치는 경향이 있다. 몽테뉴는 이런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누구나 자기가 아는 것을 자기가 아는 만큼만 쓰면 좋겠다. (중략) 한 줌밖에 안 되는 지식을 내세워 보려고 물리학 전체에 대해 저술하려 든다. 이 악덕으로부터 심대한 과오가 생긴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몽테뉴는 이 말이 식인종들과 그들이 사는 땅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한 말이지만, 실상 정보를 누구나 다룰 수 있는 지금 누구나 모든 분야에서 그런 과오를 저지르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몽테뉴는 이야기꾼들의 허깨비에서 벗어나 식인종들의 진정한 모습을 다루려 한다.
그는 이렇게 운을 뗀다. "각자가 자기 관습이 아닌 것을 야만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면, 이 신세계에는 아무것도 야만적이거나 원시적인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몽테뉴는 우리의 삶의 양식이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의 삶이 모든 삶의 표준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화를 익히지만, 이 '자연스러움'이라는 말은 식인종들에게도 어울린다. 오히려 그들은 '자연'이라는 말에 우리보다 더 어울린다.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 순수한 자연의 힘에 기대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요약한다. "이들 신세계의 민족들은 인간 정신에 의해 형성된 것이 거의 없고 아직도 그들의 원초적인 천진성에 아주 가까이 머물러 있기 때문에 내게 그런 점에서 야만적으로 보인다. 그들을 다스리는 것은 여전히 자연의 법이며, 우리의 법에 의해 변질된 바가 매우 적다."
그들의 세계관은 매우 단순하다. 거래도 없고, 문자도 없고, 판관도 없고, 노예도 없고, 부유함과 빈곤의 구분이 없고, 재산 분할도 없고, 농사도 없고, 거짓말이나 배신이나 용서 같은 윤리적 단어들 자체가 없다. "그들의 윤리학은 전쟁에서의 굳건한 용기와 아내에 대한 사랑, 두 가지 항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몽테뉴는 우리의 세계가 갖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아직까지도 횡행하는 거래 상의 불공정함, 세계사 속에 흑역사를 뿌려놓은 노예 제도와 차별 등을 생각하면 타당한 주장이다.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식인을 왜 하는 것일까? 식인은 그들의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연법에 먹칠을 하는 듯 보인다. 몽테뉴는 그들을 이렇게 변호한다.
몽테뉴가 들은 얘기에 의하면 그들의 식인은 단순히 사람을 식량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복수심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들은 용기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그들의 전쟁은 영토, 돈, 사랑 같은 부수적인 것들을 목적에 두지 않고 순수하게 용맹을 겨루기 위해 벌어진다. 그들은 잔혹한 일을 행하고 당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을 끊으려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용맹을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적에게 굴복하느니 적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낫다는 것이 그들의 심리인 것이다. 그것도, 사람을 산 채로 먹는 것도 아니고 죽인 뒤에 먹는 것이니 몽테뉴의 시대에 벌어지던 화형 같은 것들에 비하면 차라리 인도적이라고 볼 요지도 있는 셈이다. 용맹은 식인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용맹이 최고의 덕목이기에 부족의 여자들은 남편이 자신에게만 묶여있지 않고 오히려 용맹을 떨치며 많은 여인들을 거느리기를 바란다고 한다. 즉 그들의 식인 문화를 비롯한 기이한 문화는 용맹을 중심으로 한 문화이기에 전혀 비판할 거리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몽테뉴에게는 칭송의 대상이다. 몽테뉴는 "용감하다는 것은 팔과 다리의 꿋꿋함이 아니라 그가 지닌 마음과 영혼의 확고함을 가리킨다."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용맹에 대한 사랑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저번에 읽은 「중용에 관하여」에서 파우사니아스의 어머니의 일화를 읽고 든 생각이 식인종들에 대해 그대로 든 것이다. 당사자들은 용맹을 수호하며 명예를 지키는 죽음을 맞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죽고 남겨지는 사람들은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 용맹에 대한 믿음을 부족 전체가 똑같이 공유한다고 해도, 슬픔이라는 감정 또한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감히 숨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용맹을 찬양하는 풍조는 '용감한 자'와 '겁쟁이'를 구분하여 후자를 차별하게 된다. 개인이 타고나는 용맹의 차이를 고려하면 굉장히 억울한 구분이 아닐 수 없다. 타고난 기질이 약자를 만든다면 타고난 피부색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과 뭐가 그렇게 다르단 말인가.
식인에 대한 옹호도 마찬가지로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호승심이 곧 식인으로 이어질 이유가 없다. 나는 패자를 존중하는 문화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상대를 용맹으로도 이기고 도덕으로도 이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식인이 식량을 얻기 위한 방법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그들의 땅이 비옥하다는 몽테뉴의 말을 들어보면 굳이 식인 외에 식량을 얻을 방법이 널려있을 텐데 굳이 식인을 옹호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여성들의 문화 또한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문화가 시키는 대로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솔직한 마음을 죄악시하고 억눌러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래서 문화를 존중하는 것도 좋지만 모든 문화가 최종적으로 지향해야 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가 똑같은 모습을 갖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상에 기반하여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변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끼리 서로의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세가 모든 문화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