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30
과유불급, 즉 지나침은 부족함과 다름없다. 누구나 지나친 쾌락이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 것이다. 지나친 애욕이 성적 착취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지나친 선의가 가혹한 처벌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엄준한 정의와 자유로운 쾌락의 중간점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중용을 취해야 한다. 성경의 「로마서」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현명하지 말고, 절제 있게 현명하여라."라고, 「에세」에서도 "과녁을 넘어가는 화살은 과녁에 못 미친 화살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나는 특히 몽테뉴가 인용한 파우사니아스의 사례가 기억에 남는다. 그의 어머니는 파우사니아스가 정치적 음모를 들켜 아테나 신전에 피신하자, 직접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아들의 위치를 폭로하고 은신처의 출입구를 손수 돌로 막았다고 한다. 결국 파우사니아스는 갇힌 채 아사했다고 한다. 몽테뉴는 이를 두고 공정하기보다는 괴상하게 보인다고 평했는데, 내 감상도 똑같다.
다만 몽테뉴는 중용의 기준이, 즉 최선의 정의의 기준이 문화권마다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인신공양 문화는 서구의 문명화라는 탄압을 통해 없어졌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그것이 선이었다. 우리가 야만적이라고 보는 행위들은 실상 그들만의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만 지적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각자의 삶의 양식 속에서 어느 것이 바람직한지 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예화가 있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스텍 문명을 정복할 때 어떤 민족이 그의 호의를 사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그들은 세 종류의 선물을 준비했다. "나리, 여기 다섯 명의 노예가 있습니다. 당신이 살과 피를 먹는 사나운 신이면, 이들을 드십시오. 그러면 노예를 더 많이 데려오겠습니다. 당신이 온화한 신이면, 여기 향과 깃털이 있습니다. 당신이 인간이면 여기 있는 새들과 과일들을 받아 주십시오." 나는 이 제안이야말로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정의에 관해 가진 차이를 인식하고 상대에게 그대로 남을 선택권을 주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