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28
이번 글은 몽테뉴의 '우정 예찬'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단,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몽테뉴가 우정을 느끼게 한 '라 보에시'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라 보에시는 몽테뉴보다 세 살 위였지만 몽테뉴의 절친한 친구였다. 라 보에시는 엄청난 재능을 가진 수재로서 이미 열여덟 살에 「자발적 복종」이라는 훌륭한 소논문으로 명성을 떨친 듯하다. 몽테뉴는 라 보에시에 대해 이미 아는 상태로 라 보에시를 직접 만나게 됐고, 그 순간부터 둘은 서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사이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만남이 시작한 지 4년 만에 라 보에시가 병으로 급사하고 만다. 이 사건은 몽테뉴에게 큰 슬픔을 준다. 몽테뉴는 호라티우스의 시구를 빌려 이렇게까지 말한다. "너무 이른 타격이 내 영혼의 반쪽을 내게서 앗아 갔으니, 남은 반쪽인 나, 무엇 때문에 여기 더 머무를 것인가, 덜 사랑스러운 반쪽으로 남아, 전체로 살지도 못하면서? 그날 우리 둘 다 죽은 것이거늘!"
내가 보기에 「에세」의 시발점이 바로 라 보에시의 죽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몽테뉴가 그렇게 집요하게 죽음에 대해 파헤치는 것도, 잊을만하면 라 보에시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도, 결국 그의 발상의 재료가 라 보에시의 죽음이었다는 증거이다. 몽테뉴는 당초에 「에세」의 중심에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을 두고 나머지를 자신의 글들로 채우려 했지만, 「자발적 복종」이 다른 곳에서 다른 목적으로 유포돼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고 밝힌다. 그 대신에 1권의 정중앙에 둔 것이 바로 이 「우정에 관하여」이다.
이 글에서 몽테뉴는 자신이 라 보에시로부터 느꼈던 기쁨을 여과 없이 고백하며 칭송한다. 둘의 우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우정의 범주를 넘어선다. 라 보에시와 자신을 두 몸을 가진 하나의 영혼으로 비유할 정도이다. "나는 내 의지를 전혀 의심치 않거니와, 나와 하나가 된 친구의 의지도 의심치 않는다. 세상의 어떤 말도 내 친구의 의향과 판단에 대해 내가 지닌 확신으로부터 나를 떼어 낼 만큼 강력할 수 없다. 그의 어떤 행위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건, 나는 즉각 그 동기를 알아볼 것이다. 우리 영혼은 단단한 결합 속에 하나의 멍에로 묶였고 너무도 뜨거운 애정으로 서로를 주시하고 같은 애정으로 서로의 오장육부 저 밑바닥까지 다 알아보았기에, 그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알았을 뿐만 아니라, 분명 나에 관한 일을 나 자신보다 더 기꺼이 그에게 의탁했을 것이다."
이런 우정이 고귀한 것은, 우선 그들의 관계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자식처럼 자연이 맺은 관계는 어느 정도 의무감에 움직인다. 반면 순수한 우정은 의무에 예속되지 않고 오로지 두 사람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맺어진 것이다. 둘째로 이런 우정은 목적이 없기 때문에 고귀하다. 서로 숨기는 것 없이 허심탄회하게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고, 그렇게 드러난 사실들의 변동에도 서로에 대한 마음은 변치 않는다. 셋째로 이런 우정은 육신을 넘어 정신적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고귀하다. 이 우정은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사랑과 비슷해서, 서로 정신적인 기품을 갖춰서 영원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도록 꾸미게 한다. 한마디로 우정이 꾸미는 데 한계가 있는 육신 대신에 정신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번 글을 통해 몽테뉴와 라 보에시의 관계가 얼마나 각별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울음이 책 밖으로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라 보에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몽테뉴로부터 수많은 성찰을 배우고 있는데 라 보에시가 그 수많은 성찰들의 거름이 됐다니, 라 보에시라는 사람 자체가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한편 이렇게 정신적인 차원에서 사람을 성장시키는 우정이 정말 부럽다. 나는 몽테뉴가 자신의 우정을 최고로 치면서 다른 형태의 사랑들을 깎아내리는 것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모든 관계에는 저마다의 이점이 있다. 몽테뉴와 라 보에시의 경지처럼 모든 것이 통하는 우정도 결국 서로 비교할 거리가 없어져서 사람을 언젠가는 답보시킬 위험이 있다. 특히 둘의 신념이 잘못된 것인데 둘이 확신에 차 있는 슬픈 경우라면 골치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지에 이른 뒤 겪는 기쁨이 부럽다. 나를 완벽히 알아주고 내가 완벽히 아는 사람이 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할 일인가! 목적 없는 관계가 부모의 정밖에 없는, 그마저도 반례가 쏟아지고 있는 요즘 사회에서 나는 두 남자의 브로맨스가 부럽다.
다음 글은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소네트 스물아홉 편」이라는 제목이지만 라 보에시의 소네트는 실려있지 않고 다른 책을 보라는 말만 실려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다음 글인 「중용에 관하여」를 읽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