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학을 결정하고 집에서 처음 「학문의 즐거움」을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추천한 분이 있어서 읽었다. 놀라운 책이었다. 무언가를 이룬 사람은 감추려고 해도 천재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히로나카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히로나카가 제시한 길은 나도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히로나카는 학문의 길을 위대한 것으로 포장하여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으로 둔갑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학문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얼마 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도 똑같은 감흥을 느꼈다. 이번에는 이 책을 통해 내가 히로나카처럼 훌륭한 학자가 되려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히로나카는 이렇게 말한다. "사는 것은 배우는 것이며, 배움에는 기쁨이 있다. 사는 것은 또한 무언가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며, 창조에는 배우는 단계에서 맛볼 수 없는 큰 기쁨이 있다."
히로나카는 '특이점 해소 정리'라는 난제를 해결했다. 특이점 정리 자체는 히로나카가 뛰어들기 전에도 어느 정도 틀이 잡혀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틀은 아니었다. 대학원생이었던 히로나카는 특이점 해소 정리를 해결하고 싶다는 야심을 갖는다. 물론 세기의 난제였으니 쉬운 길은 아니었다. 특이점 해소 정리가 해결될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히로나카는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강했다.
그 배경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길에서 모르는 아이가 자신을 무심결에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수학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남이 만든 이론을 배울 뿐이던 히로나카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과연 선생이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했다. 생각 끝에 내놓은 결론은 이것이다. "선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면 이전에 남이 한 말을 반복해서는 안 되고 자신만의 이론이 있어야 한다." 히로나카가 움직인 것은 이 때문이다. 히로나카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한 명의 선생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히로나카는 특이점 해소 정리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들고 나서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다. 회의적인 시선에 주눅 들기도 했고, 자신보다 나은 천재들의 존재에 압도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창조의 즐거움을 깨닫고 하루하루 정진해나간다. 그가 처음에 낸 논문도 다른 참고문헌들에서 이미 다룬 문제를 그대로 다룬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서투른 첫걸음이 없었더라면 위대한 마지막 논문도 나오지 않았다. 히로나카는 연구를 하면서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기도 한다. 소심심고(素心深考)라는 말이 히로나카의 연구 철학을 대표한다. 히로나카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은 방식을 고집하다가 업적 하나를 놓친다. 히로나카는 이를 통해 방식에 사심이 들어가면 시야가 좁아지고 사실이 아닌 것을 굳게 믿게 됨을 깨달았다. 어떤 곁가지에도 휘둘리지 않는 소박한 마음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는 것, 이것이 소심심고의 의미이다. 히로나카는 결국 소심심고를 통해 대업을 이루었다.
히로나카의 학문 인생에 '창조'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히로나카에게 창조는 무엇인가? 히로나카는 푸앵카레의 말을 변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창조는 송이버섯이다." 송이버섯은 조건이 좋으면 균근이 점차 크게 자라지만 이런 조건이 한없이 계속되면 균근만 발달하다가 버섯을 만들지 못하고 노화해 죽는다. 그러면 버섯은 어떻게 해야 생길까? 균근의 성장을 방해하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래야 균근이 성장을 멈추고 버섯을 피워 포자를 날려 새로운 삶을 도모할 수 있다. 이 비유에서 균근의 성장은 지식의 축적에 해당한다. 하지만 땅 밑에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안주하기만 하면 죽은 삶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역경과 마주했을 때 과감히 지식을 땅밑에서 솟아난 버섯처럼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기적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 표출하는 행위이다.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불편함, 삶 속에서 결핍된 개념을 보충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 자체가 창조이다. 그렇게 삶 속의 장애물을 극복해나가는 즐거움이 곧 학문의 즐거움이다.
학문의 즐거움은 곧 창조의 즐거움이다. 이전에 자신에게 없던 것, 그러나 자신이 지금 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을 사용해 만들어내는 즐거움이 학문의 즐거움이다. 창조하지 않으면 남이 만든 것에만 의존하는 삶이 된다. 이런 삶은 온전히 나만의 삶이 아니며 최선의 삶이 아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바꿔나갈 수 있을 때, 학문은 완성된다. 학문의 목표는 창조여야 한다.
지금껏 내가 하던 학문을 반성해 본다. 나는 교과서 바깥의 영역을 궁금해한 적이 없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면 기뻤지만, 내가 새로운 지식을 발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나의 목표는 창조가 아니라 완벽한 암기였다. 내 삶과 동떨어진 공부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창조의 즐거움이 있더라면 나는 더 멀리 갔을지도 모른다.
이제 새로운 인물상을 추구하려 한다. 배우는 인간을 넘어 창조하는 인간이 내 새로운 목표다. 나도 히로나카처럼 진정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아직은 무엇을 창조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지만, 창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한 걸음 나아간 것이 아닐까? 히로나카의 첫 논문처럼 형편없는 시작이라도 히로나카의 특이점 해소 정리 논문처럼 위대한 결과로 향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