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는 쉼표가 필요 없다

by 러너인

1999년 중국 북경, 밀레니엄 버그 기사가 쏟아지던 해 그녀를 처음 만났다. 제대 후 말 잘 듣는 복학생으로 다시 태어나 떠난 6개월 어학연수였다.

당시 나는 연애경험도 없고 이성에 관심도 없었다. 남녀가 층을 다르게 쓰는 유학생 기숙사지만, 유일하게 서로 마주치는 공간이 여자 층의 공용 세면실이었다. 아침이나 저녁 늦게 세면실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성적이라 인사를 나누진 못했다.

어느 날 계단을 오르는데 누군가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오빠. 안녕하세요? 00 대학에서 오셨죠? 얼굴 자주 뵀어요. 나중에 시간 될 때 이야기 나눠요." 당황해서 꾸벅 짧게 인사하고 다시 올라가는데 귀에 한 마디가 꽂혔다. "오빠, 저 시간 많아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성에 인기 없는 나에게 이국 땅에서 관심 가져주는 분이 있다니 묘했다. 하지만 그분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샌님 같은 내게 거침없는 성격의 그녀는 어울리지 않았다. 공부에 집중하려던 때라 잊기로 했다.

그 뒤 그녀는 마주칠 때마다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아는 체를 했다. 그때마다 목례만 하고 조용히 방으로 올라왔다. 어느 날 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열었더니, 그 씩씩한 여자분이었다. "오빠. 늦은 시간에 들려서 미안해요. 혹시 청소도구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네. 여기 있어요."

그녀가 나간 뒤 같은 방을 쓰는 동기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누구는 인기 많아서 좋겠다." "무슨 소리야? 청소도구 빌리러 온 건데?" "이 시간에 그게 말이 되냐. 핑계지. 저분이 만나면 먼저 너한테 말 걸고 인사하는 거 몰라? 관심 있어서 그냥 말 붙이려고 온 거잖아." "에이. 오버 아니야?" "아무튼 누군 살판났네. 우리 방도 청소해야 하니 지금 가서 빨리 달라고 해." "알았어."

그녀가 청소도구를 빌려간 뒤 한 시간쯤 지나서 그녀의 방에 처음 들렀다. 노크를 하니 그녀가 문을 열었다. "오빠, 오셨어요? 제가 갖다 드려야 하는데... 처음 오셨으니 차라도 한잔하고 가세요. 잠시 앉으세요. 방 같이 쓰는 친구가 여행 가서 오늘 늦거든요."

빨리 청소도구만 챙겨서 나가려다 자리에 앉았다. 먼 타국에서 매번 얼굴 볼 때마다 씩씩하게 먼저 인사하는 그녀가 고맙기도 하고 응원하는 마음도 들었다. 잠시 후 그녀가 준비한 차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공부 이야기였다. 중국어를 더 잘하고 싶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저 고민이 하나 있어요." "어떤 고민인데요?" "부탁이 있어요. 제 고민, 오빠가 꼭 들어주신다고 약속부터 해주세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얼마든지 도와드릴게요. 근데 제 능력 밖의 일이면..." "오빠가 해주실 수 있는 거니까 제가 부탁드리는 거죠" "그래요? 그게 뭔데요?"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오빠, 제가 한국에 몇 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는데요. 그 애랑 몇 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있는데 제가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아... 사랑 이야기구나. 근데 연애도 제대로 못한 내가 무슨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제가 지금 중국에 혼자 왔잖아요. 남자친구랑 싸우기도 했고, 그 애는 너무 생각이 어리고 유치해서 별로예요. 그 애는 저를 더 좋아하지만요." "그런데요?" "근데 진짜 고민은요... 제가 여기서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게 문제예요." "그래요?"

"네. 좋아하는 마음이 커졌는데,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남자친구예요. 그냥 별로지만 남자 친구랑 계속 사귀어야 할지, 아니면 지금 마음이 끌리는 사람과 새로운 만남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민이 커졌어요." "그러시겠네요."

"만일 오빠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아요?" 남의 연애이야기라 느긋하게 말했다. "서로 결혼한 것도 아니고 젊잖아요? 정말 자기 마음이 가는 곳으로 결정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지 않을까요? 저 같으면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랑 새로운 만남을 가질 것 같아요."

그녀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겠죠? 사실 제 생각도 그래요. 근데 그거 아세요? 제가 말한 그 사람이 바로 오빠예요." 그 말에 멍해져서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아. 감사해요. 근데 제가..."

"오빠, 아까 제 부탁 들어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제가 여기 온 게 중국어 공부 때문이라서요. 죄송한데 저한테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주실래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하루만 생각하고 말씀드릴게요." "네. 저 오빠 좋아해요. 부탁드려요." "네. 고마워요. 늦었으니 쉬세요."

방으로 돌아와서 생각에 잠겼다. 공부하러 왔다는 게 이유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사귀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너무 적극적인 성격이 부담스러웠다. 좋아하는 마음이 없이 일방적인 관심만으로 사귄다면 결국 그 만남은 좋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정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누군가 호감을 표시해 준 일도 드문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게 맞을까. 어떻게 말해야 상처 주지 않을까 고민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음날 그녀의 방에 다시 찾아갔다.

"오빠, 오셨어요?" "네. 밤새 생각해 봤어요."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애써 피하며 말을 꺼냈다. "제가 어학공부에 집중하려고 와서 지금 한국 분들과 사귀면 중국어를 배우러 온 목적과 안 맞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지금은 누군가를 사귈 상황이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부족한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입을 열었다. "하하, 농담이에요! 저 사실 오빠 안 좋아해요. 사실은 저랑 친한 친구가 수시로 오빠 이야기 꺼내면서 호감이 간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 대신에 이야기 꺼낸 거예요. 전 남자친구도 있고 누굴 새로 사귈 상황도 아니거든요. 그 친구는 지금 혼자예요. 저보다 여성스럽고 예쁘기도 하고요. 오빠, 생각 있으면 그 친구 제가 소개해드릴까요?"

그녀의 말을 또 진짜로 믿었다. '그냥 장난인가.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친구분이 어느 분이시죠? 나중에 소개해주시면 오며 가며 인사 나눌게요." "네. 제가 나중에 꼭 소개해드릴게요." 그렇게 그녀와 헤어졌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장난쳤다는 말은 자존심이 상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꾸며낸 말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남녀 공용 세면실에 갔다가 어느 여자분과 마주쳤다. 스치듯 지나가서 유심히 보지 않았는데, 이 분이 그때 그녀가 말한 친한 친구라는 확신이 들었다.

용기 내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00 대학에서 연수온 정승우라고 해요. 지나치다가 자주 뵈었는데 처음 인사드려요. 00님이 말씀하셔서 조만간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그녀가 수줍게 인사를 받았다. "전 000에요. 저도 평소에 자주 뵈었어요. 항상 사람들과 함께 다니셔서 그냥 있었는데 먼저 말 걸어주셔서 고마워요."

그날 이후 그녀와 조금씩 대화가 늘었다. 어느새 그녀와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그 탓에 청소도구를 빌려간 그녀의 친구와 그녀는 사이가 완전히 멀어지고 애꿎게 우리 둘이 만나는 다리만 놓아준 셈이 되어버렸다.

그때 사귀던 그녀와는 2년 후 헤어졌다. 내게 소중한 추억을 선물해 준 그녀와 그때의 만남을 주선해 준 속상했을 27년 전 또 다른 그녀를 떠올린다.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 피천득. 인연.

아니 만났어야. 아니, 만났어야.


쉼표 하나가 만남의 의미를 가른다.
누군가를 안 만났어야 좋았을지, 아니면 꼭 만났어야 좋았을지 불완전한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피천득 님의 인연을 읽으며 쉼표를 어디에 찍어야 할지 생각에 잠긴다. 추억은 아름답다.
하지만 추억에는 쉼표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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