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번 역에서 내려요
열사의 땅, 트랙에 섰다. 토요일 아침 7시, 대회 페이스로 10km를 달리는 러닝 훈련 시작이다. 전말 새벽 회사 스트레스로 잠을 설쳤더니 자신이 없다. 햇살은 따갑고 습도는 기가 막힌다.
400m 트랙은 8차선이다. 1번 레인은 가장 안쪽에 위치한 차선으로, 빠른 속도로 달리는 고속 레인이다. 풀코스 3시간 30분 목표조까지 1번 트랙에서, 그다음부터는 3번 트랙에서 뛴다.
1호선 막차를 탔다. 트랙이 지하철 노선이라면 1번 트랙은 1호선이다. 우리 조는 트하철 1호선 막차다. 그다음 조부터는 3호선 탑승이다.
2km까지는 조깅으로, 3km부터는 450 페이스로 달려야 한다. 따가운 햇볕을 그대로 맞으며 뛰는 사막 같은 트랙. 조깅부터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전날부터 바닥난 멘털과 체력은 금세 한계를 드러낸다. 저 뒷조로 갔어야 했나. 후회할 겨를도 없이 트랙 위 속도는 조금씩 빨라진다.
지하철 환승역이 자꾸 생각난다. 3호선으로 갈아탈까. 언제 갈아탈까. 계속 1호선을 타고 갈 수 있을까. 트하철 1호선 막차를 탔는데 놓치면 1호선으론 목적지에 갈 수 없다. 3호선은 막차 시간이 길다.
5km쯤 지났을까? 정신이 없고 몸에 열이 오른 게 느껴진다. 게다가 바로 두 번째 자리에 서있어서 곧 선두주자와 교대해서 리딩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앞에 서있다가 퍼지면 곤란하다. 코치님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너무 한 사람만 끌면 지치니까, 서로 번갈아가며 리딩하세요!" 일단 빠져서 제일 뒤로 순서를 옮겼다.
3번 레인, 3호선 환승 준비. 더 이상 같이 뛰면 민폐일 것 같아서 트랙을 돌자마자 마음을 정했다. 이번에 환승이다. 지금이 환승할 타이밍라고 생각하는데 앞에서 뛰던 두 분이 갑자기 같이 환승역에 내렸다. 당황스럽다. 이게 아닌데. 내가 환승할 타이밍인데... 일단 조금 더 달려보기로 했다.
2바퀴를 돌고 나니 더 정신이 없다. 곧 1호선 열차를 떠나보냈다. '안녕. 난 정말 이번 역에서 환승해야 해. 목적지까지 무사히 잘 가기를 바래.' 혼자 3호선, 3번 레인으로 갈아타고 속도를 조금 늦췄다. 몸에 열이 오르니 더 빨리 지친다.
풀코스를 뛴 것도, 100km 도전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고 지칠까. 3호선을 타고 천천히 달리는 것도 버겁다. 에너지 고갈인가. 가까스로 10km를 채우고 훈련을 마쳤다. 역대급 피로도에 더위를 먹은 듯 멍해진다.
집에 와서 오늘 트하철 1호선을 생각하다가 6년 전 대학로 학전에서 만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떠올렸다. 4번이나 보러 간 그 공연. 많이도 감동받았던 그 공연.
공연을 보고 와서 유튜브에서 찾은 뮤지컬 OST 걸래의 노래, '울 때마저도 아름다운 너'를 다시 듣던 기억.
"용기를 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왜냐면 넌 너무 예뻐, 울 때조차"
만진창이 된 채 지하철 텅 빈 의자 끝에 앉아 조용히 '선녀'를 위로하는 노래를 읊조리는 '걸레'의 처연한 모습. 그녀의 노래는 곧 뜨겁게 날아올라, 마치 우리를 위로하듯 어루만진다.
어느 순간 걸레는 사라지고,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만이 공연장을 가득 메운다. 처절하게 망가진 한 인간이 마지막 힘을 다해 상처받은 이를 위해 부르는 뜨거운 눈물과 포옹, 위로의 떨림은 공연 현장에서 온전히 그 느낌이 전해진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무대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98년 11월. 1997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IMF 긴급구제금융, 강력한 구조조정, 대량해고, 비정규직 양산으로 사회가 양극화되고 많은 이들이 삶의 희망을 버리던 바로 그때 그 시절 이야기다.
연변에서 불같은 사랑을 하다 사라진 남자 친구를 찾아 한국에 온 '선녀',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곰보할매', 옛 청량리 집창촌 588에서 몸을 팔며 사는 '걸레', 588에 기생하며 사는 혼혈고아 '철수'
서울역에서 노숙하며 삶을 이어가는 '문디'와 '땅쇠', 일수로 돈을 번 여사장 '빨간바지', 제비이자 빨간바지의 기둥서방 '제비', 지하철에서 운동권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는 절름발이 도피 운동권 학생 '안경'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서울 옛 집창촌(옛 청량리 588)에서 벌어지는 추하고 아름다운 삶과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 2025년의 서울에서 그 흔적은 더욱 음지에서 더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1998년의 선녀와 2025년의 선녀,
1998년의 걸레와 2025년의 걸레,
1998년의 안경과 2025년의 안경
선녀, 걸레, 안경은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졌을까?
지금도 그들은 아직 우리 곁에 숨 쉬고 있고 우리가 외면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말없이 존재한다. 선녀가 지금 우리 곁에 온다면 우리는 어떤 노래로 위로할까?
그날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선 정말 내리기 싫었다. 그분들과 계속 타고 가고 싶었다. 오늘은 정말 내리고 싶은 트하철 1호선이다. 그때도, 지금도 결국 삶은 환승의 연속이다.
P.S. 코치님! 저, 가끔은 3호선으로 갈아탈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