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전, 고3 모의고사 전날 머리 아파서 바람 쐬러 밖에 나왔다. 집에 가려면 가게가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지만 빙 돌아가야 해서 망설였다. 육교를 건너면 바로 집까지 갈 수 있었다. 걸음을 아끼려고 인적이 드문 육교를 선택했다. 올라가기 전 무심코 육교 위를 올려다보니 위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올라갔다가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다시 내려올 생각으로 육교에 올라갔다. 한 놈이 내가 올라간 육교 반대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느낌이 안 좋아서 올라온 계단 바로 맞은편 계단으로 내려갔다. 겁먹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천천히 반대편 계단으로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순식간에 세명한테 둘러싸였다.
위에서 망을 보던 한 명이 뒤에서 덮쳤고. 육교 계단과 반대쪽 계단 사이 컴컴한 시옷 자 공간에서 두 명이 튀어나와서 나를 둘러쌌다. 양쪽에서 내 양팔을 각각 끼고 어깨동무를 했다. 둘 다 큰 체구에 행동대장처럼 능숙했다. 양팔을 결박당하다시피 한 채 꼼짝달싹 못하고 걸으라고 해서 계속 걸었다. 길게 늘어선 방음벽에 붙은 인도이고 외져서 밤에는 다니는 사람이 없는 길이었다. 평소 성범죄도 자주 일어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곳이라 정신이 아득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가장 키가 작은놈이 깐죽거리며 내게 물었다.
"야. 너 돈 있지? 얼마나 있어?"
무서웠지만, 불량학생처럼 보이는 이 깡패들이 내일 시험인 고3 수험생까지 건드린다는 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오기로 이렇게 뱉어버렸다.
"그래, 넌 얼마나 필요한데?"
갑자기 진공상태로 들어간 듯 주위가 고요해졌다. 1분...? 시간이 멈춘 듯 우리 네 명은 어깨동무한테 말없이 계속 조용히 걸었다. 그 무시무시한 세 놈이 모두 얼어붙은 장면이라니.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어깨동무하며 걷다가 처음에 내게 물었던 녀석이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너... 넌 얼마 있는데?"
내가 "오천 원."이라고 대답하니 그 녀석이 "그 돈 내놔."라고 했다. "어. 여기 있어." 주머니에 있던 비상금 오천 원을 꺼냈다. 순순히 내어주는 내 모습에 그 세 명이 기가 막혔는지 화난 듯 보였다.
"이 놈이 아까 너무 세게 나와서 뭔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에이씨." 하며 몇 대 더 쥐어박고 돈을 뺏았다.
시험 전날 돈 뺏기고 얻어맞아서 기분은 나빴지만 묘한 승리감이 찾아왔다. 캄캄한 밤, 인적 없는 인도에서 세 명에게 둘러싸여 양쪽에서 어깨동무하며 협박당하는데. "그래? 넌 얼마나 필요한데?" 라니. 그 등치가 산만하던 녀석들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순간 다들 얼어서 멍하니 있던 순간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들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고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끙끙대던 순간을 가끔씩 떠올린다.
세상이 내 양팔을 양쪽에서 붙잡으며 "너 용기 있지? 얼마나 있어?"라고 위협하듯 물으면 여전히 나는 대답할 것이다.
"그래, 넌... 그까짓 용기, 얼마나 필요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