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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 얼굴 팔러 왔수다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수다

by 러너인

찐 브런치 작가에겐 글이 얼굴이다. 지금은 브런치가 감히 나를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라 부르지만 여전히 난 브런치 4수생이란 전과자다. 브런치 고시생이 숨어 들어간 나만의 브런치(?)는 인스타그램이었다. 브런치 작가들은 공감하기 어렵겠지만 인스타는 사진이 명함이다.

나이 마흔여섯 아재가 인스타그램에 셀카를? 나조차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라 고민에 빠졌다. 나도 품위 있게 원조 브런치 작가님들처럼 사진 하나 없이 글로만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다. 이름 석자도 드러나지 않는 간지 나는 필명으로 나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브런치를 먹을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쫓겨간 곳은 더 무서운 곳이었다. 훌렁훌렁 헐벗은 미남 미녀들이 득실득실한 비주얼의 끝판왕, 인스타그램. 그곳의 원조들은 인별이라 불렀다. 나는 어떤 별이 될 수 있을까? 우주에 있는 수많은 별들처럼 인별에는 눈만 돌리면 눈부신 별들이 넘쳤다. 나이가 50을 향해 가는 남자 사람, 갓 달리기에 빠진 내가 별이 될 수 있다고?

'주제 파악을 해. 네가 무슨 별이야?'

그래도 어쩌겠나. 그렇게 글을 잘 썼으면 브런치에 덜컥 합격해서 나도 sns에 이렇게 썼겠지. "저... 다들 브런치에 몇 수해서 합격했다고 해서 기대도 안 했는데. 어제 자기 전에 문득 생각나서 신청했는데, 오늘 합격 메일 받았어요. 얼떨떨하네요." 이 인간들아. 그런 이야기가 재수, 삼수, 4수생에겐 얼마나 아픈지 아나. 그래도 어쩌겠나. 그분들의 필력이 출중한 걸. 글에도 금글이 있고 흙글이 있고, 금손작가가 있고 흙손작가가 있다. 내가 흙손이라 잘 안다.

각설하고 인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얼굴을 드러내든 몸을 드러내든 뭔가를 드러내야 했다. 부실한 몸은 달리면서 나아지곤 있었지만 내보일 정도는 아니었고, 얼굴은 들고 못 다닐 정도는 아니지만 sns에 용기 있게 내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달리고 나면 어딘가 올려서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걸 보여야 하는데 사진이 문제였다.

안전한 방식이 있었다. 자연을 찍는 것. 꽃이나 나무. 조금 더 용기내면 발이다. 러닝화를 신은 발 사진을 찍어서 올리기. 신기하게도 아주 조금씩 용기가 생겼다. 조금씩 사진에 몸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얼굴을 드러내는 커밍아웃을 했다. 악플 수천 개가 달리진 않을까? 지금까지 나와 친해진 인스타 친구들이 다 떠나가지 않을까 수만 개의 걱정을 안고 덜컥 올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세상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한 사진 내리라는 악플도 없었다. 그냥 반가워하는 댓글과 평소처럼 조용한 일상이었다. 처음 레깅스를 입고 불안한 마음으로 달리러 나간 새벽처럼 작은 용기는 소심한 나를 조금 더 세상으로 떠밀었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용기가 없던 나를 사람들과 함께 달릴 수 있게 응원했다. 용기를 얻었다. 이까짓꺼 아무것도 아니구나. 얼굴 내놓는 거, 내 이름 석자를 걸고 sns를 하는 것, 나를 세상에 보이는 게 사실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만큼 책임감 있게 살면 그뿐이구나.

연예인도 아닌 중년 러너가 쓰는 비주류인 인스타그램에 쓰는 글을 보러 누군가 놀러 오기 시작하면서 글쓰기에 재미가 붙었다. 나도 꽤 괜찮은 사람 같아서 다시 도전을 시작했다. 결국 브런치에 추가합격했다. 달라진 게 있었다. 4년 전 브런치 작가가 되기 전의 나는 철저히 나를 감추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4수를 하며 브런치 지망생 신분으로 야전에서 단련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단 출간계약서를 손에 쥐고 느긋한 마음으로 금의환향했다. 게다가 얼굴과 이름을 내놓는데 익숙했다. 매일 사진을 올리던 습관이 있어서, 그냥 글만 쓰는 게 밋밋했다. 글에 맞는 사진을 골라 그 위에 제목을 입혀서 글 상단에 붙였다. 그게 나이고 내 글이니까.

무심히 브런치를 하다 보니 나와 다른 작가님들의 차이를 발견했다. 일단 사진이다. 나는 사진이 있고 그분들은 글만 있다. 글로 엄숙하게 승부해야 할 이 신성한 공간에 사진 따위라니. 하지만 나는 사진 하나 쯤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글이 주는 이미지를 더 확장시켜 주니까. 다른 차이점은 본인 얼굴이다. 아주 가끔 본인 사진을 프로필사진으로 올리는 경우가 있지만 거의 드물다. 나는 그냥 얼굴 내놓고 하니까 다르다. 세 번째는 본명을 노출하느냐 인데. 신비주의 같기도 하고 멋지기도 해서 필명을 쓰시는 것 같다. 난 필명이 없었다가 몇 달 전 브런치 작가님들 모임에 다녀와서 민망한 마음에 하나 만들었다.

다들 저는 000입니다.라고 소개하는데 나만 내 책 이름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 작가라고 소개하는데 민망했다. 책 홍보에 혈안이 된 사람처럼. 나도 필명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날이다. 여러 가지 실험 후 '러너인'이라는 필명을 만들었다. 본명 '정승우'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프로필 소개에 꿋꿋하게 밀어 넣었다. 글을 인스타에서 막 배워서 그런지 나는 고상한 걸 못 참는다. 내 글도 그래서 꽤나 솔직하다. 헐벗은 사람들 속에서 아픔을 드러내고 도전하는 나를 보여온 지난 4년은 헛살지 않았다. 내가 가진 아주 작은 강점은 부족한 나를 드러내는 데 스스럼이 없고 내 얼굴, 내 이름을 걸고 글을 쓰고 달리고 일하는데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뿐이다.

이번 브런치 1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알 수 있었다. 야전 브런치에서 글을 써온 내가 무엇이 다른지. 4수생이 가진 특징이 뭔지. 하도 글마다 얼굴을 드러내고 쓰다 보니 내 글을 읽어주신 작가님들을 나는 그분들을 알아보지 못해도 그분들은 나를 모두 알았다. 보자마자 아! 러너인님!이라고 알아주시는 그 기쁨이란. 브런치의 비주류 작가로서 이렇게 알아봐 주시는 건 그 재주 하나 때문이 아닐까?

가끔은 얼굴과 이름만이 아닌 책도 잘 팔고 싶고 좋은 글도 팔고 싶다. 글로만 자신을 파는 멤버십 작가님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난 글보다 얼굴을 먼저 팔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 나름 비주얼 작가니까.(이 한 줄로 처음 악플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고백한다. 난 브런치에 얼굴 팔러 왔수다. 책도 팔러 왔수다. 오디오북도 팔러 왔수다. 마음도 팔러 왔수다. 응원도 팔러 왔수다. 도전도 팔러 왔수다. 용기도 팔러 왔수다. 가끔은 나도 사고 싶다. 당신 글과 마음, 그리고 당신의 용기를.


P.S. 파는 김에 몇 장 더 팔고 간다. 나는 대한민국 작가 러너인 정승우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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