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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바는 강사님이 처음이에요

by 러너인

첫 강연 발표자료를 어떻게 작성할지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고전적인 PPT를 써야겠다는 생각 정도였다. 회사에서 쓰던 템플릿을 변형해서 쓸까 하다가 편집도 불편하고 항상 PC앞에서만 작업해야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AI시대인데 PPT 말고 더 나은 건 없을까? 첫 강의라 잘하고 싶었다. 검색해 보니 캔바라는게 있어서 가입하고 살펴보았다. 그냥 온라인에서 작업할 수 있는 PPT 같은 건가? 한 달간 무료라 일단 신청해서 살펴보니 템플릿이 꽤 괜찮았다. 처음엔 스포츠나 러닝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템플릿을 찾아보니 헬스장 홍보 PT에나 어울릴 디자인이 쏟아졌다.


'이건 아니지.' 계속 스킵하는데 잔잔한 바탕에 그림과 글이 은은한 템플릿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의 계보를 보여주고 각각의 신을 가운데 사진으로 놓고 양쪽으로 깔끔하게 설명해 주는 방식. 비주얼한 설명이 가능한 구도가 마음에 들었다. 너무 튀지 않지만 깔끔했다. 마음을 정했다.


특히 목차를 단순히 텍스트로 보여주는 방식이 아닌 신의 동상을 작은 아이콘으로 만들어서 어떤 식인지 보여주는 방식이 좋았다. 나도 일단 내용을 구성하고 그 내용의 대표이미지를 섬네일로 묶어서 제일 앞쪽에 목차에 배치해서 처음부터 듣는 분들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면서 따라갈 수 있도록 배치했다.


처음엔 생각나는 대로 에피소드를 넣었다가, 정해진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다간 이도저도 안될 것 같아서 과감하게 임팩트가 적은 50km 울트라마라톤 편과 뒤의 귀동상 고흐런과 비슷한 한파런을 뺐다. 일단 그 상태로 전체를 구성한 뒤 출력해서 밖에 나가서 걸으며 2시간을 실제처럼 연습해 보았다. 하다 보니 어느 에피소드는 조금 더 길게 하는 게 좋고 어느 편은 줄이는 게 나았다. 집에 들어와서 다시 수정하고 다듬었다.


지금까지 대회 때 찍었던 사진, 영상들이 많아서 보여줄 게 많았다. 그중 에피소드를 부각시킬 영상을 찾아서 넣고, 현장감을 극대화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배치했다. 캔바의 장점은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휴대폰으로도 발표자료를 고칠 수 있었다. 출퇴근 버스에서 생각나면 바로 고치고 메모장에 추가할 영상, 뺄 내용들을 오가면서 계속 업데이트했다.


첫 소개를 고민할 때 인스타그램 어느 광고 피드를 보니 무료자료가 있었다. '안녕하세요'로 시작하지 말라는 내용과 첫마디에서 끝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전문가의 말이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부터 인상적인 인트로를 구상했다. 도서관과 공무원 각각에 맞는 가장 인상 깊은 인트로. 전자는 '가족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후자는 '공무원 대상 강연은 영혼이 없다고 합니다...'를 키로 잡고 하나씩 만들어 sns에 올렸다. 내가 준비되어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세상에 당차게 알리는 의미도 있었다.


첫 강의라 마음이 작아지고 있었다. 그때 책과강연 이정훈 대표님의 '초보작가라는 말 쓰지 마세요' 영상을 보고 감명받았다. '초보강사라서...', '제가 첫 강의라...' 양해를 구하면서 시작하려는 소심한 마음을 접었다. 그 결의를 담아 '나는 프로다'라는 영상을 찍어서 대놓고 sns에 올렸다. 돈 받고 하는 일은 모두 프로다. 나도 첫 강의지만 프로다. 돈 받고 하니까. 러너로서 나는 뒷걸음질 치지 않기로 했다.


환절기라 감기가 유행이다. 잘 준비해도 감기에 걸려서 목소리가 안 나오면 낭패라서 퇴근길에 따뜻한 목도리를 하나 샀다. 그 길로 낮에 더워도 계속 목에 두르고 다녔다. 회사에서 동료가 별로 춥지도 않은데 오버냐고 했지만, 나는 '선수 보호 차원인데 당신이 그 깊은 뜻을 어찌 알겠냐.' 하며 꿋꿋하게 하고 다녔다. 그 덕분인지 무사히 강연을 마칠 수 있었다.


처음은 항상 설렌다. 경기도인재개발원 담당자님이 '강연자 중 캔바로 강연하신 분은 작가님이 처음이에요!'라고 하셔서 기뻤다. 굳이 폰트를 신경 쓸 필요도 없이 그냥 url하나만 보내면 끝이니까. 출강 가는 길에 생각나면 바로 핸드폰으로 고쳐도 되니.


새로운 도구, 새로운 도전, 첫 도구, 첫 강의... AI시대에 필요한 건 새로움을 받아들이되 자신의 강점을 살리는 도전정신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행복한 도전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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