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북 프로젝트

by 러너인

어제가 막공이었다. <팬데믹 플레이>란 연극. 9개의 에피소드 중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의 대사와 장면들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 은솔이라는 한 여자와 정우, 진우 두 남자 이야기.

은솔이 진우를 떠나는 장면이다. 불쌍하게 붙잡는 진우와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은솔. 진우는 시인 지망생, 은솔은 여전사 같다. 하지만 은솔이 전사가 된 건 진우가 가슴에 남긴 칼자국 때문일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자고 애원하며 진우가 말한다. "언제부터 나는 너에게 '다 읽어버린 책'이 되었을까?" 은솔이 절규하듯 말한다. "안 읽어. 이제 안 읽을 거야. 너라는 책."

시간이 지나 은솔은 정우를 사귀지만 정우는 은솔에게 마음이 떠난다. 정우가 은솔을 떠나는 장면이다. 아이를 가졌을지 모른다는 은솔의 말에 자기에게 손해 가는 일이 생길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정우.

은솔이 말한다. "언제부터 나는 너에게 '다 읽어버린 책'이 되었을까?" 정우가 내뱉듯 말한다. "넌, 그런 말 어디 적어놓고 다니냐. 난 네가 눈 감고 혼자 중얼거릴 때가 제일 무서워. 지긋지긋해. 문어체 공격"

떠나는 은솔에게 하던 진우의 말을, 떠나는 정우에게 은솔이 똑같이 하는 장면에서 서글펐다. 서로 닮아간다는 말처럼 어쩌면 은솔은 작가 지망생인 진우의 그 미끌거리는 말이 좋아서 함께 있었고, 그 미끌거림에 지쳐서 떠났지만 이미 자신도 그런 문어체를 구사하는 사람이 된 게 아닐까.

입술을 많이 깨물었다. 가끔씩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우라는 사람의 찌질함이 불쌍하고, 마음을 다쳐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은솔이 아프고, 어느새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정우의 차가움에 가슴이 서늘했다. 은솔이 몸과 마음이 망가진채 정우의 집에서 나오는 장면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사랑과 이별. 누군가에게 다 읽은 책이 된다는 말이 너무 와닿아서 가슴이 저렸다. 나도 그에게 다 읽은 책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도 나에게 그런...

사람이 책과 같다는 말이 계속 가슴에 맴돈다.

어떤 책은 두고두고 곁에 두고 보게 되지만, 어떤 책은 한 번 읽고 구석에 치워두거나 결국에는 재활용이나 중고서점으로 보내지니까. 사람도 그럴까. 책처럼.


어쩌면 그 에피소드 때문에 세 번이나 공연장을 찾은 게 아닐까. 어릴 적 전설의 고향 TV 프로그램이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눈을 빼꼼 가리고 귀신 나오는 장면을 보는 심정처럼 아플 걸 알면서도 그 아픔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 심리치료 상황극을 보듯 세영님과 배우님들 연기에 빠져들었다.


휴먼북 라이브러리. 어느 도서관에서 본 휴먼북이 떠올랐다. 사람이 책이다. 사람을 등록하면 그의 경험과 지식이 필요한 사람이 대출 신청을 하고,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다는 프로그램.


가까운 용인시 도서관에 휴먼북이 있다. 등록하려면 자기소개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자세히 적게 되어 있다. 도서관에 앉아 꼬박 5시간을 빼곡히 신청서를 썼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책인지, 누구에게 어떤 스토리를 들려줄 수 있는지, 언제 어디에서 가능한지, 학생들 학교에 찾아가서 멘토링을 해줄 수 있는지도.


누군가에겐 난 '다 읽어버린 책'이지만, 휴먼북 라이브러리에서는 언제나 '새롭고 기대되는 책'이 될 것 같아서 신청했다. 누군가 '읽고 또 읽는 고전 같은 책'이 되고 싶다.


네게 내가, 나에게 네가 '다 읽어버린 책. 이미 알 것 모를 것 다 알아버린 식상한 책'이 아닌 항상 새롭고 읽을수록 깊어지는 휴먼북이 되고 싶다.

은솔이라는, 정우라는, 진우라는 세 권의 휴먼북. 마치 어릴 적 책을 앞뒤로 넘기면 두 개의 스토리가 교차하듯 서로가 서로의 상처가 되는 뫼비우스의 띠.


서로가 다 읽은 책이 된다는 건 아프다. 다 읽었으면 필사라도 할 마음이 드는 좋은 문장이라도 있어야 또 읽지 않을까.


나라는 휴먼북에 누군가의 가슴에 남을 좋은 글귀, 밑줄치고 형광펜을 긋게 만드는 그 무엇을 새길 수 있게 좋은 생각과 고운 마음으로 하루를 달리며 연다.


신청서를 제출했다. 1-2주 안에 결과가 나온다. 안되면 어떤가. 아예 출간도 안 했으니 '언제나 읽힐 가능성이 있는 책'으로 남는 거라 괜찮다.


나라는 휴먼북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라이브러리에 검색해 보면 언제나 '대출 중. 예약 중'으로 뜨는 휴먼북,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 우리는 만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또 만날 것'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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