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너의 살갗 안으로 들어가는 일
정원에게
오늘은 하루종일 하늘이 잿빛으로 가득했단다.
비가 올 듯 말 듯, 축축한 공기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창문 밖을 자꾸 내다보게 되는 그런 날이었지.
요즘 우리가 사는 지역
댐 수위가 완전 바닥을 보일만큼
가뭄이 심각하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데
너도 느꼈을까?
가뭄, 단수, 물절약이라는 단어들이 실린
현수막들이 곳곳에서 내 시선을 붙잡는
요 며칠이란다.
아침엔 엄마가 너에게 괜한 잔소리를 했지.
문 앞에서도 모자라 문을 벌컥 열고서 목소리를 높였던
내 모습이 부끄러움으로 떠오른단다.
샤워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문득 '가뭄'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고 나도 모르게 감정이 앞섰단다.
내가 가진 이성이 아닌, 상황의 감정이란 걸
지금에서야 말해주고 싶구나.
미리 이런 상황들에 대해 너와 이야기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해보다는 지적이 먼저 앞섰던 나의 행동이 돌아보니
얼굴이 붉어질만큼 창피하구나.
넌 그저 평소처럼 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엄마가 나의 기준을 들이댄 거였어.
그래서 오늘은 너와 '공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어.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 보면
아버지 애티커스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지.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
(중략)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지."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마음이 멈칫했단다.
공감이라는 것이 단지
'알아주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때 제대로 알았던 것 같아.
공감은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심과는 다르단다.
연민이나 동정심이 타인에 대한 이해보다
자신의 기준에서 타인을 해석하며
가지게 되는 감정이라면
공감은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대입하고
그 사람의 상황을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 걸어가는 것.
즉, 역지사지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말이야.
엄마는 요즈음 이 공감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걸 느껴.
아이들과 책을 읽을 때 특히 그래.
너도 아는 <빨간 머리 앤>, <어린 왕자>,
<긴긴밤> 같은 책들은
엄마에겐 깊은 울림이 있는 이야기인데,
아이들은
"이게 왜 감동적인데요?" " 그냥 재미없어요."
라고 말하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든.
순간 속상한 마음에 제대로 읽은 거 맞냐고
잔소리를 하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단다.
' 이 아이들은 아직 삶의 경험이 쌓이지 않은 어린 나이구나.'
공감이라는 건, 결국 시간과 경험이 쌓여야
더 깊어지는 건지도 몰라.
정원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너와 다른 생각, 다른 속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야.
그들과 잘 지내는 게 중요하다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잠시라도 들여다보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걸 엄마는 점점 더 느껴.
오늘 아침 엄마가 한 잔소리도
결국은 이해보다 감정이 앞선 순간의 실수였어,
너에게 사과하고 싶단다.
그리고 이 편지로 다시 말하고 싶어.
우리는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공감하려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훨씬 더 부드럽고 따듯해질 거야.
단수될까 걱정하느라 비가 안 오면 속상하고,
그 속상함으로 너에게 괜한 잔소리가 튀어나온 날엔
더 마음이 축축해지지만,
이런 날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게 아닐까?
엄마도 여전히 실수투성이이면서
오늘도 너에게 함께 생각해 보자고
이렇게 편지를 쓴다.
너를 사랑하는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