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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대신 화실을 선택했더니

책 <럭키 드로우>를 읽고

by 마레몽

대학생이 된 나는 관광학과에 진학했다는 핑계로 방학 때마다 해외여행을 다녔다.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와 근로장학생을 하며 모은 돈으로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경험을 얻고, 추억을 만들었다. 여행하며 본 이국적인 풍경을 핸드폰 카메라로 담았는데, 돌아오고 사진을 다시 보면 멋진 풍경을 그저 사진에만 담았다는 것에 아쉬움이 느껴졌다.


새 학기 시작과 동시에 취미 화실에 등록했다. 여름방학에 떠날 여행에서는 사진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풍경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간 다녀온 여행지를 그리면서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여행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그림의 세계는 나를 점점 이끌었다. 무심한 듯 선의 강약으로 표현되는 펜화, 칠하면 칠할수록 깊어지는 연필화, 맑은 하늘처럼 투명한 수채화 등 알면 알수록 그림은 더 잘 그리고 싶은 욕망을 갖게 했다. 매주 화실에 나가며 그림을 완성하다 보니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그토록 고대하던 여행을 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지만, 나는 비행기표 대신 화실에 주 4회 반을 등록했다.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아 이거 저거 건드려보다 1년 넘게 지속했던 일이 없었다. 그런 내가 그림에 완전히 빠져버려서 화실에 없었던 주 4회 반을 처음 만든 것이었다. 세계 곳곳을 도장 찍듯 다니는 게 꿈이었던 나는 이제 여러 소재를 그리고 다양한 화구를 쓰며 그림 세계를 도장 찍기 시작했다.


그림은 여행처럼 질리지 않았다. 그릴 때마다 새로운 나라를 여행하는 느낌을 주었고, 더 다양한 것을 보고 그리고 싶어 했다. 방학 때마다 떠나던 해외여행에 대한 욕망이 사라져 더이상 여행도 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휴학을 한 나는 운이 좋게 화실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림을 더 깊게 배울 수 있었다.


여행의 끝은 결국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기에 결국 나는 그림 여행에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복학 후 졸업을 하고 자격증 공부를 하며 취업을 준비하고 현실을 살다 보니 어느덧 사회인이 되었다.


돈은 없지만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학생때와 달리 직장인의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지나갔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다 보니, 되고 싶은 직업이 되었음에도 피로감과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지루함을 못 참고 퇴사하게 되었다.


퇴사를 하고 나니 학생 때처럼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대신 학생 때처럼 돈도 제한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해외에 있는 친구가 숙소비도 필요 없으니 자기가 있는 곳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몇 년 만에 해외여행을 갈 생각에 설레어했다.


그런데 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점차 고민으로 변하게 되었다.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예전처럼 비행기표 대신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림 여행을 떠나기 위해 화실에 등록했다.



<럭키 드로우>

p.142

당장 돈이 되지는 않지만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어쩌면 평생 다른 사람의 일만 해주며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돈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지금 내가 투자하고 있는 시간과 노력이 언젠가 내게 더 큰돈과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거나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 새로운 도전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p.144

그만큼 시간을 많이 써야 하는 일들이었기에 나는 내 가치를 높여줄 더 멋진 일에 시간을 쏟기로 했다. 단기적인 시각에서는 수입은 줄고 지출은 더 많아지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더욱 집중해 장기적으로는 나의 가치를 높이는 투자라고 확신했다. ... 결과적으로 내 일에 더 많은 투자를 할수록 그만큼 수익도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점점 더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집중해 나갔다.


p.145

... 나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자신의 일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퇴사를 한 이유 또한 그림이었다. 그림에 빠진 이후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그림을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는 냉혹했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을 그림으로 책임지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림을 그렸을 때만큼 내가 욕심내서 했던 일이 있었을까? 결국 그림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기 어려워 퇴사를 하게 되었다.


5년 전 그때 내가 화실 대신 여행을 택했으면 어땠을까? 새로운 일을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내가 오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림을 위해 회사를 떠날 수 있었을까? <럭키 드로우> 책을 읽으니 내가 배운 일들은 결국 어떤 형태로도 다시 돌아오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퇴사 후 경제사정이 그리 넉넉지 않아 화실을 등록할 때도 망설임이 많았다. 그럼에도 내가 화실에 등록해야 하는 이유를 <럭키 드로우>에서 설명해 주었다. 당장 화실에서 배우는 그림이 내 수익으로 가져다주지는 않겠지만, 내가 새로운 일을 위해 다시 화실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또한 다른 모습으로 내게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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