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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는김작가 May 08. 2016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28.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사랑의 속삭임을 듣다.


"봄이 가기 전에 우리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읽어 보는 건 어때요?" ㅡ 줌마 Y


"아, 좋아요, 좋아! 그럼 제가 예전에 읽었던 책이긴 한데, 그거 추천해 드릴까요? 문득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ㅡ 줌마 K


"응? 사랑이야기?? 갑작스레 무슨 사랑 타령들이야…. 연예라도 하려는 건감? 아…. 언제적 이야기야. 새삼스럽네" ㅡ  나, 역시 줌마


"아, 그렇긴 하죠, 그래도요. 봄에 어울리게 사랑 이야기가 좋겠어요. 가볍게 읽기에도 좋구요. 예전처럼 설레고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을 다시 하고 싶기도 하네요. 홍홍홍! 우리 책 읽고 이야기해봐요~." ㅡ 줌마 Y



그렇게,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원제:Nord wind, 다니엘 글라타우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읽는 내내,

잠들어있던 사랑에 대한 아련한 모든 기억들과 생활에 지쳐 다소 무디어진 감성들을 하염없이 흔들고, 흔들어, 깨워주었다.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와 그 바로 전,

 바 로 후 에 도.'

         ㅡ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웹디자이너인 에미는, 구독하던 잡지를 그만 보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해당 잡지사에 보낸다. 주소를 잘못 입력한 것을 모르고 계속 같은 주소로 반복하여 이메일을 보내, 잡지 구독 중단을 요청하는 에미.  


그렇게 여러 차례 자신에게 잘못 발송되어 오는 이메일을 받아보던 언어심리학자 레오.  그는 결국 그 잡지와 상관없는 사람임을 밝히는 답장을  에미에게 보내게 된다.


운명처럼 잘못된 이메일 주소 덕분에, 에미와 레오 두 사람은 서서히 온라인 대화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전혀 모르는 사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

필시 앞으로 볼 일 없을 사람,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는 사람.



이메일이라는 온라인의 공간 속에서 만난 기혼녀 에미와 싱글남 레오는, 전혀 모르며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기에, 자신의 마음을 가감 없이 표현하며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이메일들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계속 이어지고, 대화가 오고 가는 횟수를 거듭 할수록 서로가 꿈꾸던 이상형임을 의심치 않으며, 서로를 더욱더 상상하게 된다.

'환상의 사랑'이라 해도 무방하리.



하루 24시간 중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일까? 아마도 다들 잠이 든 한 밤 중이거나, 이른 새벽이 아닐까 싶다.



홀로 고즈넉하게, 잠들지 않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밤의 고요와 정결함. 그것을 여러 차례 맞이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시간이야말로,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깊숙한 내면의 나'의 모습을 투명하게 마주 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또 다른 나를 찾아내 그 모습을 펼쳐 보이기에 아주 좋은 시간이 새벽 세 시, 그 언저리 즈음이라는 것을.



에미와 레오는 그렇게 한 밤의 이메일을 통해서, 단순한 일상의 기록들을 주고받는 차원의 소통을 넘어 각자의 내밀한 생각들을 고백하게 된다.

어떤 날은 <에미>의 지친 하루를 풀어놓는 하소연의 장이 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사랑에 실패한 후 한껏 쓸쓸한 <레오>의 외로운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러다 자연스레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키워나가게 된다.



'레오, 당신을 대할 때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게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아요. 당신에게 이건 기대해도 된다, 이건 안 된다…… 그런 걸 깊이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거리낌 없이 저돌적으로 글을 쓰는 거죠. …… 레오. 그래서 당신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



이렇게 에미는, 레오를 향한 자신의 강렬한 감정을 토로한다.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상관없어요. 나는 당신의 글과 사랑에 빠졌어요. 당신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돼요. 얼마든지 딱딱하게 써도 돼요. 난 그 모든 것을 사랑하니까요.'



레오 또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 에미에게 친밀한 관계에 대한 소망을 제시한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면서 사랑이 환상적으로 점점 무르익어갈 무렵의 어느 날, 레오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이메일을 매개로 하는 환상의 사랑. 끊임없이 고조되는 감정,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리움, 가라앉을 줄 모르는 열정, 이 모든 것들이 현실에서의 만남이라는 하나의 진짜 목표, 지고의 목표를 향하고 있지만, 목표 실현은 번번이 미뤄지고 만남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직설적인 멘트가 레오에게 날아온다. 바로 에미의 남편 '베른하르트'가 보내온 글이다.

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차분한 목소리로 에미와 자신의 만남과 결혼 생활, 그동안의 상황들을 제시하면서 레오에게 당부의 글을 보낸다. 제발 에미를 만나, 이 '환상의 사랑'을 끝내 줄 것을 진지하게 거듭 부탁한다. 그래야만 에미는 예전의 그녀로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이 소설의 끝부분은 상상에 맡긴다.



책장을 덮으면서 생긴 의문들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정말 베른하르트의 말대로 에미와 레오, 두 사람은 글을 통한 환상의 사랑 하고 있는 것일까? 주인공들의 감정들이 한낱 권태롭고 외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순한 유희와 같은 이었을까?

만약 두 사람이 직접 얼굴을 대면해 만나는 순간이 온다면, 서로에 대한 환상이 끝나면서 글로 주고받은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것인가? 그리하여 베른하르트의 의도대로, 만나서 잔뜩 부푼 모든 기대감들이 깨뜨려지게 되면, 다시 에미가 레오를 알지 못하던 예전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소설의 결말은 이렇게 많은 궁금증을 내게 불러 일으켰다. 답을 내리긴 쉽지 않다.



어쨌건, 읽는 도중, 이메일로 주고받는 소설 전개 다소 지루한 감이 있어 읽기를 몇 번 멈추기도 했지만, '남녀의 성향에 대한 근원적인 차이점'과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새삼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라 나름 의미가 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메일 속의 달콤한 속삭임과 만남을 꿈꾸며 보내는 글들을 보면서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에세이의 구절들이 떠올랐었다.



'낭만적 약속은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다. 그 약속의 무기력과 무의미를 간파하는 시간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 <사랑의 미래, 이광호>

  


의미심장하고 날카로운 통찰이 아닌가 싶다.



연인 상태가 되어 주고받는 낭만적 약속.

그 약속의 무기력과 무의미를 간파하는 시간이 온다는 것.

그것은 정말 슬픔, 그 자체이다. 두말해서 무엇하리.



그러나, 무장해제 상태로 사랑에 한껏 도취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그 낭만적 약속들이 없다면 지상에 '결혼'이라는 게 가능할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살면서 적절한 환상과 낭만적 약속은 지속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마저 없다면 우리의 삶은 맨 정신으로 유지하기에 너무 팍팍하고 버겁지 않을까?



아울러, 이 문장도 뜻깊게 다가왔었다.



 '세상이 모든 연인들은 연인에게 닿기 위한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 연인들의 손가락은 자라난다.'

        - <사랑의 미래, 이광호>



서로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라난다는 손가락……. 하나씩 하나씩 점차적으로 사랑이 커져간다는 표현치곤 참 재미난 발상인데, 에미와 레오의 경우, 더더욱 잘 적용되는 듯 하다.

연인들의 손가락이 닿기 위해 자라나듯, 이메일을 주고받음에서 나아가 두 사람이 서로를 직접 만나보길 원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 아니한가?




이 책의 원제는 <Nord wind>이다.  

북풍!

검은 구름과 많은 비를 몰고 오는 바람!

아리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갈릴리 호수에서 만나 돌개바람이나 거친 광풍을 일으키기도 한다는데, 에미는 그 북풍이 불어와 잠 못 드는 밤에 레오에게 이메일을 쓰곤 한다. 머릿속에서 북풍을 몰아내는 데 레오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면서 말이다.



성경에 빗대어 본다면 북풍은, 고난과 재난을 가져오는 불길한 기운(잠 25: 23)이기도 하고, 모든 염려와 장애를 없애버리는 맑은 바람(아가서 4: 16)이기도 하다.

둘 중 레오와 에미에게 불어온 북풍은 어느 것이 될까?

 


두 주인공의 일 년 후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니, 곧 그 책장을 펼쳐 다시 '다니엘 글라타우어'가 그리는 사랑을 엿본 후, 해답을 찾아 보아야겠다.



살랑거리던 봄날, 줌마의 '새벽 세시 바람'은 일단 여기서, 이렇게 끝을 맺어야 하나 보다.

만약 내게도 주소를 잘못 입력한 메일 한 통이 날아든다면 어쩌지? 라는 다소 황당한 상상을 해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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