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RUN RU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는김작가 Feb 20. 2016

「불타는 청춘」외전

#15. '여자 없는 남자들(무라카미하루키)'탐색기

다 잠들었다.


스멀스멀 내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아침 눈 떠 시작된 하루는 휙휙, 늘 정신차리고 나면 깊어져가는 밤중이다.

벌써 11시.

이제 '또 다른 나'가 꿈틀대는 진정한 하루의 시.


오늘은 TV가 궁금하다.

고요를 깨는 부팅 소리는 나도 재부팅는 듯 하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잡힌다.

'저게 누군가!'

한 때 모든 남성들을 설레게 했던 갸날픈 미의 결정체, 보랏빛 향기 '그녀'. 그 옆에는 혀 짧은 소리로 웃음을 잔뜩 안겨주었던, 최근 골프 마니아가 되었다는 개그맨 '그'다. 채널을 멈추고 그녀와 그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기로 한다.

두 사람은 썸을 타는 중인가 보다.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보게 . 그들은 더 이상 내 기억 속에 있던, 예전의 파릇파릇 외모가 아니다.  나이를 가늠해봐야 하는 얼굴들이 되어 있다. 슬프다.


갖가지 사정으로 여직 솔로인, 전직 잘 나가던 선수(?) 남녀 연예인들이 시골집에 모여 소소한 일상을 같이 하며 제2의 '불타는 청춘'을 고대하는 내용이다.

그러고보니, 썸 중이라는 '그'와 보랏빛 향기 '그녀'의 얼굴에 중년의 머쓱웃음이 아니라, 발그레 소녀, 소년의 앳된 생기웃음이 쏟아진다. 풍겨져 오는 느낌이 프로그램의 의도된 설정 그 이상이다.

물리적 나이를 떠나 중년 남녀가 어우러져 웃으며 서로에게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려는 순간 순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 얼마나 강한가를 감지하게 한다. 프로그램 제목처럼 진, 다시 <불타는 청춘>다.


문득, 얼마 전 한 번 더 읽었던 '여자없는 남자들'이 스친다.



여자와 남자.

서로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러면서도 늘, 서로를 그리워하고 욕망하는 아이러니한 존재.


'여자없는 남자들'은 그 남자와 여자의 아이러니한 숙명을 생각해보게 하는 7개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들은 모두 여자없는 남자들이다. 사정이야 다 다르지만, 큰 맥락은 여자를 잃었거나 본인의 의도로 여자에게서 빠져나와 '여자가 없는 남자들'이다. 현재 불타는 청춘은 아니다.


작가는, '여자없는 남자들이 된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건 여자 없는 남자들이 아니고는 이해하지 못한다. 근사한 서풍을 잃는 것. 열네 살을 영원히ㅡ십억 년은 아마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리라ㅡ빼앗겨버리는 것. 저 멀리 선원들의 쓸쓸하고도 서글픈 노랫소리를 듣는 것. 암모나이트와 실러캔스와 함께 캄캄한 바다 밑에 가라앉는 것. ……"


그리고, 그 씁쓸함을 이렇게도 읊고 있다.


'한번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어버리면 그 고독의 빛은 당신 몸 깊숙이 배어든다. 연한 색 카펫에 흘린 레드 와인의 얼룩처럼.

당신이 아무리 전문적인 가정학 지식을 풍부하게 갖췄다해도 그 얼룩을 지우는 건 끔찍하게 어려운 작업이다.



진 표현이다.

작가의 내면에 있을 '순정'이 상상된다. 지극한 갈망!

어쩌면 여자보다 남자들에게 더 어울리는 단어가 '순정'이 아닌가 생각해오던 터라 작가의 비유에 심히 혹한다.


여자나 남자나, 우리에게는 '절대적 사랑'에 대한 강한 로망이 있는 듯 하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운명적 사랑을 꿈꾼다. 비록 뜻대로 되지 않아 그 짙은 얼룩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할지라도, 죽기 직전까지 곱씹을 수 있는 <불타는 청춘>의 한 자락을 우리는 늘 열망한다.


바삐 돌아가는 현실에 치여 사랑따위 감정은 사치라 여겨질 때,

흘러가는 세월에 쇠잔해져가는 내 몸이 한없이 가엾다 여겨질 때,

<불타는 청춘>이 한 때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다. <여자있는 남자> 혹은 <남자있는 여자>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 감사할 일이다. 그것 마저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추억할 그 무엇 하나 없는 빈 껍데기 아닌가!


작가는 묻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설령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 해도.'


우리는 이 고유한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또 가슴 한 켠 잠들고 있는 순정을 꺼내드는 것이리라.

그리고, 꿈꾸는 것이리라.

나를 '완전히'는 아니나 '온전히' 이해해주고 그윽 시선을 던져줄 이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환상 아닌 환상 꿈꾸는  말이다.


'독립기관'에 등장하는 주인공 도카이처럼, 한없는 순정때문에 엄습해 오는 불안감으로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다가도, 어느 순간 불타는 청춘을 갈망하는 우리의 이중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과정을 통해 어쩌면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리라.


오늘도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고자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을, 많은 <불타는 청춘>들과 <여자 혹은 남자 없는 사람들>의 짙은 얼룩을 상상해본다.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자기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고, 그래서 불합리한 힘에 휘둘리는 기분이 든다."    -독립기관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천사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