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백석'시와 '김성호'의 노래를 음미하며, 커피커피커피!
휴.
숨가쁜 하루를 마감했다.
출근을 하면, 하루가 정말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4월 들어 일이 더욱 더 늘어난 느낌. 날마다 체력 방전이다. 머리도 지끈 어지럽기도 하고.
심지어 어제는, '직장을 그만 둘 수는 없는 걸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주변 친구들 중에 속된 말로 남편 잘 만나, 그 그늘 아래 직장도 다니지 않고 느긋하게 지내는 이들이 종종 있다. 만나서 한 번씩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부럽기도 하면서 가끔은 '사람마다 정해져 있는 운명이란 게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운명이라…….
그 단어가 아니고서는, 살면서 만나온 많은 우연들을 설명할 길이 없다.
최근에 읽었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어지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하고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깎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게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매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가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시인 '백석'의 시이다.
시의 화자는, 여기 저기 아내도 집도 없이 떠돌다가 신의주의 '유동'이라는 동네에서, 어느 목수 '박시봉'이란 사람의 집 방 한 칸에 세들어 살게 된다.
그 집의 허름한 셋방에서 뒹굴거리다 자신의 지난 날을 성찰하게 되고, 그러다 문득 가슴이 꽉 메어오며, 울컥 눈에 뜨거운 눈물도 고이고, 자신의 슬픔과 어리석음에 죽고 싶다고까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창문과 천장을 바라보다 불현듯,
이 모든 것들이, 내 뜻과 내 힘으로만 나 자신을 이끌어가기에는 역부족임을 느낀다.
그러기에,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어떤 것이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 크고 높은 어떤 것!'
바로 '운명' 을 떠올린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힘이 자신을 이렇게 이끌어 온 것이 아닌가……. 그러니 더 우울해 할 그 무엇도 없다.'
그렇게 화자는 '운명'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힘든 삶을 위로하게 된다.
그리하여, 슬프고 우울했던 감정들은 그나마 조금씩 가라앉게 되고, 마당에 있는 크고 정결한 갈매나무처럼 앞으로 의연히 살아갈 것을 거듭 다짐한다.
백석 시인의, 한 편의 자서전 같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다.
운명과 관련된 또 하나의 기억.
운명처럼,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사람이 떠오른다.
대학교 1학년 시절.
그와 커피를 앞에 놓고 마주하고 앉았는데, 그 날 따라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내게 던졌다.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었다.
그 당시 대학 신입생이었던 나는, 너무 어렸기에, 당연 '좋은 친구'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해주었었다.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다.
그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누던 커피숍, 앉았던 그 자리, 그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녀는 너무나 눈부신 모습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죠
나의 더러운 것이 묻을까 두렵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내 마음이 병이 들었죠
그녀는 천사의 얼굴을 천사의 맘을 가졌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 보지 못하죠
허름한 청바지의 플라스틱 귀걸이를 달고 있던
그녀를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건 너무나 자랑스러워
내가 갖고 있는 또 하고 있는
내가 그렇게도 원했던 모든 것
어느날 갑지기 의미없게 느껴질 때 오겠지만
그녀와 커피를 함께 했던 가슴뛰던 기억을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란 말이 점점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요즘 이기에
나는 그녀를 감히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싫었어
하지만 밤새워 걸어도 아무리 생각 해봐도
그보다 더 적당한 말은 찾아 내지 못했습니다
외로운 날이면 그녀 품에서
실컷 울고 싶을 때도 있었죠
가느다란 손이 날 어루만지며 꼭 안아 준다면
그녀는 나에게 말했죠 친절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기에 그렇게 대한 것이죠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죠
'김성호'의 '당신은 천사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 라는 노랫말이다.
아마도, 그는 나를 '천사'로 여긴 듯 하다.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늘 나를 눈부시게만 여기면서, 어쩌다 만나게 되면 커피잔을 앞에 놓고 빙긋 웃으며 날 바라보기만 했으니 말이다.
무수히 많은 앞으로의 날들을, 어쩌면 계속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나의 오만한 착각에, 솔직한 내 마음을 한 번도 표현해 보질 못한 체 그리 헤어졌다.
그리곤 영영 볼 수 없음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운명은 우릴 그렇게 갈라 놓았다.
어느 새, 인생이 중반에 접어들었다.
커피의 쓴맛도, 단맛도, 신맛도, 이제는 모두 다 느껴지는 그대로 감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내 삶의 모든 추억들이 머릿속과 마음속에 풍부한 바디감으로 새록새록 그 의미들이 되찾아지고 있다. 브런치를 쓰기 시작한 후에 일어난 변화이기도 하다
바삐 굴러가는 일상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지나간 옛 사랑을 떠올린다거나,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곰곰 헤아려보는 그 순간 만큼, 가장 순수하고 행복한 시간이 또 있을까 싶다.
갓 볶은 커피에서 풍겨져 나오는 그윽한 향을 코 끝에 가득 맡으며, 신선하고 쌉쓰름한 그 깊은 맛을 목 안으로 넘기는 순간, 좋아하는 음악까지 귓가에 흘러준다면 더 바랄 게 그 무엇이 있으리.
진한 에스프레소를 입 안에 털어 넣을 호기로움은 없으나, 나의 정신을 한껏 감미롭게 해 줄, 한 잔의 아메리카노를 손에서 놓을 수는 정녕 없다.
'당신은 천사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커피를 앞에 놓고 마주하고 앉아 있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여직까지, 남들과 다른 색깔의 사랑을 꿈꾸면서, 진심을 고백하는 걸 주저하고 있을 그 누군가를 상상해본다.
앞에서 언급한 노랫말의 한 구절처럼,
'감히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싫었어.'
라고 되뇌이고 있을 그 누군가를 말이다.
'키스 한 것을 사과할까요? 아님, 고백할까요?'
최근 많은 이들의 환호를 받은, 한 드라마의 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사랑 고백 전, 키스를 먼저한 후 주인공이 읊는 대사이다.
세대차이라기보다 사람의 개인 성향 차이에서 나온 것이긴 하겠지만,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오만가지 헛된 말들이 오고 가던 나의 그 예전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명쾌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전적으로 의심하지 않고 믿기 어렵다.
추상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 필요하다면, 무엇으로 표현해야 가장 확실하게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인식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새삼 든다.
난제다.
키스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는 여전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운명!
우리에게 운명이란 게 정녕 정해져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내 눈 앞에, 그 운명적 로드를 미리 선명히 펼쳐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그러면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한 치의 의심을 하지 않을텐데…….
지난 날 그 많은 번민과 후회는 정녕 필요 없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많은 에너지가 덜 소모될 텐데 말이다.
그러나, 인생은 역시나 친절하지가 않다.
때로는 운명을 거스르는 일이 될 지라도,
캔디에 등장하는 안소니처럼 나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고 살 것을 다짐해본다.
안소니는 캔디가 마냥 좋아서 아침 일찍, 직접 기른 장미 중 가장 예쁜 것을 골라 그녀를 기다리다 만나는 순간 손에 꽃을 안겨준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 그녀가 가득함을 정확히 알려준다.
'추상'이 '구체'로 넘어가는 확실한 순간! 캔디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 안소니처럼 용기를 낼 일이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절대 머뭇거리지 말 것!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핸드폰만 보면서 상대방을 정신없게 하지 말 것!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상대방과 눈길도 맞추지 못 하고 허공만 보지 말 것!
내 경험상 거듭 말하지만, 시간은 영원하지가 않다.
팔랑, 떨어지는 꽃잎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봄날.
누군가의 곁에 앉아 커피 한 잔의 행복과 사랑을 꼭 누리시길!
「좋은 사람」 윤보영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
나는,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좋다
나는, 커피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더 좋다
그러나, 가장 좋은 사람은
나와 함께
커피를 마시자고 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