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錦繡, 수를 놓은 비단) 펼쳐보기.
애잔함.
쓸쓸함.
아름다움.
책장을 덮고 나니, 이 세 단어가 둥둥 떠다니며 내 온몸을 휘감는다.
금수(錦繡)
진정, 수를 놓은 비단 같다.
책을 읽는 내내 그 비단 감촉의 부드러움과 한 땀 한 땀 정성껏 놓았을 수(繡)의 아름다움에 포옥 폭 휘감겨 한없이 감미로웠다.
'추억은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만 자란다.'
이렇게 책의 끝자락에 번역자 송태욱 님은 「추억과 사랑의 관계」를 나즉이 정의하고 있었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만 추억이 자란다….
이 구절을 음미하다보니 진정 주인공의 사랑이 끝난 것이었던가를 다시 떠올려보게 된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재차 물음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책을 집어 들고 <아키>와 <아리마>의 진지한 편지글 속으로 한 번 더 들어가 보기로 한다.
대단 흥미로워 하염없이 읽었던 소설.
읽는 내내 가슴 한 켠이 계속 아렸던 소설.
옷 매무새를 고치고 앉아 읽어야 할 것 같았던 소설.
<아키>와 <아리마>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며 펼쳐 보여준 금수錦繡, 그 비단수의 아름다움과 절절한 인생 속으로 전격 재입수!
'자오의 달리아 화원에서 돗코누마로 오르는 케이블카 리프트 안에서 설마 당신과 재회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돗코누마의 승강장에 도착할 때까지의 20분간, 거의 말을 잊어버린 상태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가쓰누마 아키>의 편지가 시작된다.
소설의 첫 부분이다.
12,3년 전에 헤어진 전남편 <아리마 야스아키>를 우연히 케이블카 안에서 만난 <가쓰누마 아키>는
망설이고 망설이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주소를 알아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그에게 손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 연한 갈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좁은 케이블카 안의 우리 맞은편 자리에 앉았습니다. 문이 닫히고 흔들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저는 그 남자가 당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의 놀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요?…… 저는 멋진 단풍이 보고 싶어 케이블 카에 탔는데도 한시도 수목으로 눈을 옮기지 않고 눈앞의 한 남성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아주 잠깐 동안 이 사람이 정말 예전의 내 남편이었던 아리마 야스아키 씨일까 하고 몇 번이나 자문자답했습니다.'
그렇게 <가쓰누마 아키>는, 우연히 만난 전남편과 재회 순간의 상황과 그때의 감정을 하나도 놓침 없이 세세하게 적어나가고 있었다.
정말 두 사람의 사랑이 끝난 상태여서 추억이 자라기 시작하나?
마음 속 물음을 따라 나는 다시금, 미야모토 테루의 매혹적인 글 속으로 쑥 빠져들어간다.
10여 년 전, 클럽의 호스티스 <유카코>가 교토의 한 여관에서 모 건설회사 과장인 <아리마 야스아키>와 동반 자살을 시도한다. 유카코는 옆에서 자고 있던 아리마의 목을 찌른 후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으나, 아리마는 생명에 지장이 없어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신이 다른 여자와 동반 자살을 하다니, 그게 믿을 수 있는 일이었을까요? 우리는 오랜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했고 겨우 2년이 지났으며 이제 막 아기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저는 필시 사람을 잘못 본 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교토의 단골 고객들을 기온의 클럽에서 접대하다 늦어졌고, 평소처럼 야사카 신사 옆의 여관에 묵고 있을 터였습니다.'
그렇게 새벽 5시에 울린 전화 한 통화는 평온한 <아키>의 모든 일상을 뒤흔들어 버렸다. 남편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대학 1학년 때 서로 알게 되어 5년의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 <아키>와 <아리마>. 결혼 2년 차에 벌어진 일이다.
아키는 사건 후 입원 중인 남편에게 유카코가 누구인지, 앞뒤 사정을 망설이다 결국 물어보지 못했고, 아리마 또한 아내에게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서로 헤어짐'을 선택한다.
그렇게 헤어진 후 우연한 재회를 계기로, 아키는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둔 십여 년 전의 모든 궁금증과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담은 잔잔한 고백편지를 아리마에게 보내게 되고, 편지를 받은 후 답장을 하지 않으려던 아리마의 마음을 결국 열게 되어 그의 손에 펜을 잡게 만든다.
'삼가 올립니다.
편지 잘 받았습니다. 편지를 다 읽었을 때는 답장을 쓸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날이 지남에 따라 저 역시 이야기하지 못했던 많은 심리적 사건을 가슴 속에 담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저하면서 펜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어쩐지 애매한, 거기에 확실한 의지가 없었던 우리의 이별이라고 썼습니다만, 그건 잘못 안 겁니다. 제 쪽에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될 명백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 저는 이 편지를 <세오 유카코>와 저의 관계에서부터 쓰려고 합니다. 그게 당신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아리마의 정중하고도 애절한 글이 한 땀 한 땀 아키를 향해 날아들었다. 유카코 라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서로의 마음 속에 담아둔 모든 궁금증을 풀어줄 이야기들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각각 다시 새로운 무늬의 인생 수를 엮어나가는 순간이다.
이것이 정녕 사랑이 끝난 자리인지, 나는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기로 한다.
작가 '미야모토 테루' 는 비를 피하려고 잠시 들른 서점에서 읽은 유명 작가의 단편 소설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카피라이터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인생에서 마치 우연처럼 자신의 진로가 바뀐 듯 말하고 있지만, 어쩌면 준비된 운명에 의해 작가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작가란 그저 노력만으로 글을 잘 쓰게 된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 <아리마 야스아키>도 그렇게 준비된 운명처럼, 치명적 미모 <세오 유카코>를 만났다.
중2 때이다. 아리마의 부모님이 갑작 돌아가시게되자 아리마의 백부는 '히가시 마리즈루' 라는 작은 연안 마을에 사는 친척 손에 그를 맡긴다. 그리하여, 오사카를 떠나 바닷가의 작은 시골 중학교를 다니게 된 아리마.
준비된 운명은 거기에서 아리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마는 전학을 가서 유카코를 만난다.
열네 살의 소녀이나 요염하고 신비스러운(어쩌면 음탕한) 풍문을 지니고 있는 <유카코>
그런 그녀를 하염없이 아름답고 화려하게만 바라보는 <아리마>
유카코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는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낀다.
어느 날 방파제에 기대 하늘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에게, 거짓말처럼 세일러복 차림의 유카코가 걸어와 같이 배를 타러 가자고 제안을 한다. 뭔가 성가신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은 들었으나 그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워, 아리마는 유카코를 따라간다.
따라가 본 배에는 스물 두세 살의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리마를 보는 순간 눈빛이 험악해졌고, 배가 출발하자마자 수영할 수 있느냐는 물음과 동시에 아리마를 바닷속으로 집어던져버렸다. 그런 아리마를 바라보던 유카코도 곧장 바닷속으로 뒤따라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둘은 그 청년에게서 도망을 칠 수 있게 된다. 유카코를 늘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청년이었다.
물에 젖은 체, 근처 유카코의 집에 따라가게 된 아리마.
그런 그의 곁에 꿈처럼 그녀가 가까이 앉아있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아리마는 그녀의 볼그레한 얼굴빛에 한껏 설렌다.
바다에서의 사건을 계기로 이렇게 둘은 가까워지게 된다.
(아리마는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한 후에도, 이 추억을 '어떤 환상적이고 꿈같고 덧없으며 둘도 없는 것'으로 마음속에 계속 간직한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어처구니없게도 다음 날 바로 그녀와 헤어지게 만든다.
아리마를 돌보던 친척분이 더 이상 돌볼 수 없다고 백부에게 연락을 이미 한 상태여서 하필 그 다음날 백부가 자신을 데리러 왔었고, 할 수없이 아리마는 다시 자신의 고향인 오사카로 돌아가게 된다.
엉겁결에 백부를 따라 그 곳을 떠나게 된 아리마. 떠난 후 유카코에게 몇 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그녀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고, 물리적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자연스레 그녀는 과거의 풋사랑쯤으로 아리마의 기억 한 켠에 잠식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 3학년이 된 아리마.
대학 캠퍼스에서 교육을 잘 받고 자란 발랄한 여인에게 첫 눈에 반한다. 바로 <가쓰누마 아키>.
그녀를 사랑하게 된 아리마에겐 '유카코' 따위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나중에 유카코를 다시 보게 된 순간 아리마는, 유카코가 여전 자신의 잠재된 의식 안에 꼭꼭 숨어 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사랑하는 아키,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 어느 날, 아리마는 회사 출장으로 우연찮게 중2때 살았던 마을 '히가시 마리즈루' 로 가게 된다.
도착 순간 이내 바닷가에서 유카코와의 추억을 떠올린 그. 그는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유카코의 어머니는 그녀가 교토의 한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려주었고, 그녀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일부러 찾아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시 준비된 운명은, 업무차 백화점 근처에 들린 아리마에게 발길을 백화점으로 돌리게 만든다. 그리하여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10여 년 전의 유카코 얼굴을 바로 찾아내게 한다.
그녀, 유카코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수수한 용모의 그녀.
청순한 모습의 그녀가 거기 있었다.
그는 그렇게, 바로 한 눈에 첫사랑을 알아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횡설수설하는 아리마. 그에게 유카코는 '가온'이라는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곧 백화점을 그만둘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아리마는 한 달 후, 거래처 접대차 '가온'으로 가 보게 된다.
아리마 결혼 1년 차 때 일이다.
'경주마에 비유하자면 앞발이 뚝 부러져 두 동강이 난 상태로구나.'
아리마가 근무하는 건설회사의 사장인 <아키>의 아버지는, 이런 비유로 더 이상 딸의 결혼 생활을 지지하지 않는다. 사위인 아리마의 자살소동사건은 자신으로선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의 의견대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고, 그 어느 누구도 아리마가 유카코라는 클럽의 여성과 동반자살을 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아키의 경우 남편에게 자신의 푸념과 질투를 드러내고 싶지 않음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리마가 그 사건에 대해서 굳게 입을 다물었다.
'당신과 정식으로 이혼을 하고 난 후 두 달쯤 된 무렵이었을까요? … 장마가 끝나고 햇볕이 강렬히 내리쬐는 날이었습니다. …… 당신이 보고 싶다고 저는 몇 번이나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이 뭐란 말인가. 산산조각이 난 항아리면 또 어떻다는 말인가. 내가 좀 더 큰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걸. 그러면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돌리는 일 따위는 세상에 아주 흔한 일이지 않은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 …… 암암리에 우리를 헤어지게 하려고 한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그리고 본 적도 없는, 게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카코'라는 여성에게 온 몸의 피가 출렁출렁 물결칠 만큼 증오를 느꼈습니다. '
이렇게 또박또박, 아키는 이혼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었음을 뒤늦게서야 밝힌다.
커다란 나무와 같은 존재인 아버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버지는 사위인 아리마를 자신의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각별한 정을 쏟았었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이번 사건은 회사입장에서도 덮어두고 그대로 나아갈 수 없어 결국 딸의 이혼으로 매듭지으셨다.
'사람은 변하는 법이야. 시시각각 변해가는 신기한 동물이지.'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며, 딸 아키에게 재혼을 권장한다. 그리하여 이혼한 1년 후, 소개받은 대학강사 <가쓰누마 소이치로>와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신과의 이혼이 마치 헤어지기 싫은 데도 억지로 배에 태워져 벽안에서 멀어져 간 것 같은 거라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가쓰누마'씨와의 결혼도 가고 싶지 않은데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에 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키는, 재혼할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씁쓸하게 회고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선천성 발달 장애를 지닌 아들 <기요타카>가 태어난다.
'당신과 헤어지고 난 후 10년간 정말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다양한 일을 ……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당신과 결혼하고 1년쯤 지나 제가 교토의 가와라마치의 백화점에 멜론을 사러 들어갔다가 문득 유카코를 생각해 내고, 6층 침구 매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저는 전락을 시작했습니다. …… 저의 10년 간을 설명한다면 꼭 스모에 비유되는데, 다가서면 내동댕이쳐지고, 덤벼들면 받아넘겨지고, 상대방의 팔 바깥으로 허리띠를 잡아 던지려고 하면 상대방에 제 팔 안쪽으로 허리띠를 잡아 던져 버리고, 발걸이로 넘어뜨리려고 하면 상대방은 안걸이로 되받아치는 형국이었습니다. …… 당신과 자오에서 재회한 것은, 이를 테면 최악의 상태에 빠져있던 시기였습니다. '
<아리마>는 <아키>에게 이혼 후 자신이 처한 상황들과 유카코와의 모든 사연을 털어놓는다. 이혼 후 삶이 순탄치 않았음을 고백하면서, 그 사건 직후 죽기 직전의 치료 상황에서 겪은 불가사의한 경험도 들려준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은 어쩌면 같은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는 아키의 편지글에 대한 답변으로 말이다.
'당신의 편지에 쓰여있던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은 어쩌면 같은 일일지 모른다」는 구절을 본 순간, 저는 이상한 흥분과 오랜 생각에 빠졌습니다. 죽음에 의해 그 생명의 모든 것이 사라져 없어진다는 사고는 어쩌면 인간의 오만한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착각이 아닐까 합니다. …… 제가 살아남으로써 자신을 보고 있던 또 하나의 저는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만약 죽어버렸다면, 육체도 정신도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생명 그 자체가 되어 이 우주에 녹아들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자신이 행한 악과 선을 지닌 채 끝없는 고뇌의 시간을 계속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요? …….
아리마는 '생명은 그 자체로 죽어서도 영원히 이어진다 '며 악은 더 이상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더 이상 악하게 살지 않아야 함을,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자신의 다짐을 고백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생명'은, 인간에게 분노나 슬픔이나 기쁨, 괴로움을 느끼게 하면서 복잡하고도 미묘한 육체활동과 정신활동을 하게 하며 모든 선과 악을 만들어가고 있어서,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선이나 악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카코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을 반성하며,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아키와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아리마는 힘주어 말한다.
그렇게 아리마의 고백을 통해, 유카코와의 모든 일을 알게 된 <아키>
한 때 자신에게 이 모든 불행을 안겨준 유카코를 상상하며 증오도 했었으나, '자신을 만난 후, 항상 가정으로 되돌아가버리는 아리마'에게서 절망을 느꼈을 유카코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을 느낀다.
마침내 아키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남편과 거짓된 삶'을 청산하기로 마음먹는다. (현재, 아키의 새 남편은 다른 여자와 세 살된 아이를 키우는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물론 아키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키는 자신을 한없이 강하게 변신시켜준 아들 <기요타카>의 곁에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새롭게 자신의 인생을 재정비할 것을 다짐한다.
'요즘 저의 「지금」은 저의 과거에 의해 초래되고 있다고 확실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과거는 틀림없이 저에게 현재를 가져다주는 작용을 했겠지요. 그렇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저의 과거에 의해 이제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미래가 정해지고 만 걸까요? 이제 미래는 바꿀 수 없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요타카>가 그걸 저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요타카를 보고 있으면 저는 용기를 얻습니다.'
당신은 과거에 사로잡힌 나머지 「지금」을 잊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지금 당신의 생활방식이 미래의 당신을 다시 크게 바꾸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과거 같은 건 이제 어쩔 도리가 없는 지나간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과거는 살아 있어 오늘의 자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 사이에 「지금」이 끼여 있다는 것을 저도 당신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
이렇게 아키는 <지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과거 같은 건 이제 어쩔 도리가 없는 지나간 일로 재인식하고 과거를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기로 한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아리마에 대한 모든 궁금증이 풀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태어난 지 3개월 때부터 발달 장애를 갖고 있는 걸 알게 된 아들<기요타카>를 키우면서 자신이 예전에 비해 한층 더 강해졌음을 알린다.
그렇게 아키는 진정한 자신의 삶을 걸어가기로, 새로운 무늬의 수(繡)를 놓기로 결심한다.
'여러 가지 것들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어느 것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저만의 마음의 무늬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딱 하나 글로 전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라는 것을 본 당신은 그것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무서워졌다고 썼지요. 하지만 사실은 짧다고 하면 짧다고 할 수 있고, 또 길다고 하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가장 강력한 양식이 되는 것을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불가사의한 구조, 생명의 불가사의한 구조, … 우리의 생명이란 얼마나 불가사의한 법칙과 구조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아키의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지나온 인생을 반추하는 열네 통의 편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다시 읽어보아도 여전 흡입력이 강하다.
작가 <미야모토 테루>의 차분하고 생생한 글 전개 솜씨는 일품이다. 주인공들이 눈 앞에 어른거리는 느낌이며, 나긋 나긋한 목소리로 귓가에서 편지를 낭독해주는 듯 하다.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는 문득 나도, 첫사랑에게 헤어지면서 말 못한 이야기들과 그 동안 살아온 정황들을 또박 또박 적어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지경이었다.
나는 읽는 내내, 유카코가 되었다 아키가 되었다가 다시 아리마가 되었다.
이혼 후에도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공경심을 갖고 있는 주인공들이 정말 놀랍다.
작가는 미미한 인간으로서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폭풍 같은 예기치 않은 사건 후 밀려오는 인생에서의 절망감과 쓸쓸함을, 아키의 목소리를 통해 자세히 전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 연연하여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던 아키를 깨워 <지금>이라는 중요한 순간을 놓치지 않길 당부하고 있었다.
남녀의 만남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의 삶은 어떻게 이루어져 굴러가는 것일까?
진정 모두에게 '운명'이란 것이 혹시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의 생명이란 얼마나 불가사의한 법칙과 구조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바쁜 일상에 치여 내팽개쳐 두었던 이 난제들을 다시금 집어 들어 생각하게 만든다.
하루하루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버겁고 힘들지라도, 어느 순간 뒤돌아서서 보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보통의 일인 경우가 허다하다.
폭풍으로 거친 파도가 일고 난 후 언제 그랬냐며 곧 잔잔한 물결이 다가오듯, 삶은 늘 파도와 고요의 반복이다. 그 과정을 통해, 인생이라는 다채로운 빛깔의 한 폭의 비단수(繡)가 만들어지는 것이리라.
두 사람의 사랑을 보면서 이 글이 떠올랐다.
‘사랑은 그저 단순한 열정이나 생리적 반응이 아니다. 관계 초반에는 그럴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랑은 포용이다. 최악의 것도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지지해주는 것, 자신의 몸을 던져 상대방을 구하는 것, 상대방을 진심으로 위하고 보살피는 것, 결국에 둘은 하나가 되는 것’ - 캐리 쿠퍼
누구나 살면서 순탄하고 평화로운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당혹스럽고 절망스러울 때는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아마도 캐리 쿠퍼의 말처럼,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는 포용'이 바로 그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보다 넓고 큰 사랑인 '포용'. 누군가를 한없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감싸주는 일. 최악의 것도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지지해 주는 포용적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지칠 수 있는 인생길을 힘있게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오래 믿고 기다려온 사람들에게만 비로소 주어진다는 단순한 열정을 넘어선 포용적 사랑, 단순한 감정 너머의 그 지극한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거란 생각이 아키와 아리마에게서 풍겨져 나온다.
<아키와 아리마>의 사랑은 끝났다기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진정으로 포용하고 이해하게 되어, 보다 '한없이 지극한 사랑'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싶다. 비록 편지는 더 이상 주고받지 않게 될 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추억은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만 자란다.'고 말한 이 책의 번역자 송태욱 님의 정의를 이렇게 다시 쓰고 싶어진다.
'추억은 지극한 사랑이 시작되는 자리에서만 자란다.'
포용적인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추억할 그 무엇도 없음이며, 추억 자체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바탕으로 추억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며, 그 사랑으로 인해 인생의 수(繡)를 만들어가는 것임을….
오늘처럼 흠뻑 비가 내리는 날.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읽기 좋은 소설이다.
혹, 한없이 지극한 포용적인 사랑이 그리우시다면
혹, 인생에서 '준비된 운명'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궁금하시다면
혹, 우주와 생명의 불가사의한 구조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신다면
두 사람의 애잔하고도 지극한 사랑과 그들 인생의 쓸쓸함과 아름다움 속으로 한 번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보시길…….
그리하여 그 비단수(繡)의 아름다움에 폭 휩싸여 삶에 지친 마음도 위로받으며 지나온 인생도 한 번 돌아보시길 권한다.
「빈 배」
취한 듯이 꿈을 꾸는 듯이
황홀한 바람에 스쳐간 날들
춤을 추듯 일렁이는 별빛
쓸쓸하게 불어오네 이 밤
세월은 흐르네
꽃잎들이 피고 지듯
변해가네 내가 아닌 모든 것들
난 길을 잃은 작은 배
외로이 떠도네
추억들을 저으며
세월이란 강물 위로 흐르네
ㅡ 노래, 강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