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장미와 주목(애거사 크리스티)'을 통해 본 시간의 의미.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분이나 천년이나 의미는 똑같아요.
그리고 <테리사>는 나지막이 T.S.엘리엇의 시구를 읇는다.
깊이 사랑했으나 항상 바라보기만 했던 여인 이사벨라의 황당한 죽음 앞에서, 사랑하는 그녀가 왜 죽음을 택했는지 알 수 없어 당혹감에 빠져있는 <휴 노리스>에게 그의 형수<테리사>가 해 준 말이다. 형수는 계속 이어서 '노리스'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려준다.
"도련님은 인생을 자신이 디자인한대로 만들어가고 다른 사람을 그 속으로 끌어들이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나름의 디자인이 있어요. 각자가 자신의 디자인을 가졌기 때문에 인생이 복잡해지는 거에요. 각자의 디자인이 얽히고…… 겹치니까."
자신의 디자인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고 작가인 '애거사 크리스티'는 말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디자인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는 이가 있으니 그녀 이름은 바로 <이사벨라>다. 언제나 본질만을 생각하는 인물이다.
아크로폴리스의 처녀 조각상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천상의 미소를 지닌 이사벨라. 아름답고 늘 평온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닌 그녀는 세상 그 무엇보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은 새만 봐도 겁에 질려 하얗게 얼굴이 경직될 정도로 죽음에 대한 짙은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는 '그리스 조각상'같은 약혼남 <루퍼트>가 있다.
정력과 남성적인 아름다움이 넘치며, 유머와 지성과 근성, 침착한 안정감을 가진 루퍼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의 세례식에 나쁜 요정이 한 명도 오지 않았던 것 같다'는 평까지 들을 만큼 한마디로 '완벽한 인간체'다.
그 두 사람의 결혼식을 며칠 앞 둔 어느 날, 새벽 한 시 무렵 깊은 밤. 이사벨라가 노리스를 찾아온다. (이 소설에서 노리스는 휠체어를 타고 지내는 장애인으로 항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캐릭터다. 적극적으로 여자들에게 자신의 애정을 피력하지 않는 인물. 그래서 두 사람은 동성친구와 같은 우정을 지닌 상태이다. 무슨 이야기든 주고 받을 수 있는….)
'저, 전 떠나요…….'
'떠나요? 루퍼트와 어딜 가요?'
'아니요. 존 게이브리얼과…….'
<노리스>는 이 순간을 '인간이 가진 묘한 이중성을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내 머릿속 절반은 벼락을 맞은 것 같았고 믿기지 않았다라고, 그 날의 충격을 회상한다. 완벽한 약혼남을 두고 천하의 사기꾼같은 게이브리얼과 야반도주라니……. 기함하는 노리스!
그렇다면 장애인인 자신의 처지를 감안한 노리스가 애틋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여인 이사벨라를 후린, 존 게이브리얼!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초조하고 매우 고집스럽고, 다리를 벌리고 서거나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딱하게도 그는 심술궂은 소인배로 보였다. 그보다 더 나쁜 건, 그가 자신에게 이득이 있어야만 성의 있게 행동할 것 같은 인간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휴 노리스>가 바라본 게이브리얼의 특성이다.
보수당 후보이자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을 받은 존 게이브리얼 소령은 단조롭고 평범한 목소리와 못생긴 외모를 지녔다. 임기응변에도 아주 능하다.
'대체 그의 어떤 면이 매번 여자들을 사로잡는 걸까. 나는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생각했다. 그는 아주 못생겼다. 가식적이고, 천박하고, 허세를 부렸다. 그저 그런 두뇌에, 가끔 특정한 상황(저속한 상황!)에서만 좋은 친구였고, 유머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특징도 여자들을 사로 잡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노리스는, 여자들이 게이브리얼에게 호감을 갖고 빠져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사랑했으나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여인 이사벨라마저 게이브리얼에게 빠져드는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결혼식 며칠 전에 완전체약혼남인 루퍼트를 둔 체 야반 도주한 이사벨라를 '자그라데'라는 마을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에도, 그 악마와도 같은 연적 게이브리얼에게서 어떻게든 그녀를 구해내고자 애쓰는 노리스다.
고고하고 우아한 그녀는 격에 맞지 않게, 너무나 허름하고 지저분한 퀴퀴한 냄새마저 나는 어느 뒷골목에 위치한 집에서 게이브리얼과 살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눈이 튀어 나올 지경인 노리스!
'말해봐요. 이사벨라. 당신은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죠? 당신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에요? 법적 의미를 제외하고요. '
이 물음에 이사벨라는 골똘히 생각한 후 이렇게 답한다.
"결혼이란 누군가의 삶의 일부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 그 속으로 들어가 …… 그 일부가 되고…… 그 곳이 자신의 적절한 자리가 되는 거요."
이사벨라와 게이브리얼은 법적인 결혼은 하지 않은 체, 그렇게 허름한 뒷골목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래서 노리스는 모든 게 의아하기만 하다. 또 그녀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당신이 게이브리얼의 삶의 일부가 되진 못했다는 뜻이군요?"
"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 지 모르겠어요. 그럴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저…… 전, 그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요."
"이사벨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그때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겁니까?"
이사벨라는 답한다.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있을까요? 어떤 일에 대해서든?"
의미심장한 답변이다.
정말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있을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이사벨라를 뒤로한 체, 돌아서 나오는 노리스.
이사벨라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도저히 보이지 않는 밑바닥 같은 곳에 그녀를 끌고와 앉혀놓은 게이브리얼을 생각하면 계속 부아만 치밀어 오른다.
그렇게 화가난 노리스의 눈에 비친 이사벨라는 이렇게 묘사된다.
'꽃은 더러운 거름 더미 속에서도 변함없이 피어난다.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다. 그것이 꽃이라는 게 확연하니까…….'
이사벨라는 노리스의 염려와는 전혀 별개로 아무런 동요도 없었고 지극히 평온했으며 조용히 미소지으며 앉아있을 뿐이다.
그렇게 이사벨라를 두고 그냥 돌아서나왔던 바로 며칠 뒤. 허망한 소식이 찾아든다.
당시 슬로바키아의 독재자인 '스톨라노프'와 닮은 구석이 있는 <게이브리얼>을 향해 누군가가 그 독재자라고 착각해서 총을 쏘았는데, 뜻밖에도 그에게 날아드는 총알을 바로 옆에 있던 이사벨라가 온 몸을 던져 막아내버렸다는 것!
존 게이브리얼 대신 사랑하는 그녀가 죽은 것이었다. 이럴수가!
죽음이라는 것 자체를 가장 두려워하던 그녀가 게이브리얼을 대신해 '죽음'을 택하다니!
야반도주한 그녀를 안쓰러워하고 늘 걱정하고 괴로워하던 노리스에게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사벨라의 행동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이야기는 1940년대와 50년대를 배경으로, 영국 콘월 지방의 '세인트 루'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펼쳐진다.
<이사벨라>라는 여인의 죽음 앞에서야 그녀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지난 날을 뉘우치며 변화된 새로운 삶을 추구하게 되는 한 남자 <게이브리얼>의 이야기가 핵심이다.
<장미와 주목>은 남녀의 사랑과 우정을 보여 주면서, 사회 계층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삶에 대한 여러 시선과 정치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도 보여준다. 그러면서 우리가 '누구를 안다'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만'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어느 누구도 진짜 모습을 모두 볼 수는 없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 하다.
"나는 몰랐어. 그 여자가 날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에는 알지 못했네…… 난 그 여자의 육체를 가졌을 뿐이라고 …… 그렇게 확신했어…… 그런데 이사벨라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어.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던 여자가……"
존 게이브리얼은 그녀의 죽음 직후 노리스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갖기위해 나름 노력했으나, 신분의 차이와 본성의 다름으로 인해 메울 수 없는 어떤 간격을 느끼며 더 진실되게 행동하지 못했던 게이브리얼.
그는 그녀가 온 몸을 던져 자신이 맞아야 할 총알을 대신 막아주고 죽음으로써 사랑을 보여주자, 그제서야 자신이 이사벨라를 진정 모르고 있었음을,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음을, 그런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또한 노리스는 그런 게이브리얼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게이브리얼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어떤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볼 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좌절감의 관점에서 볼 지 화려한 성공담의 관점에서 볼 지, 둘 다 사실이다. 언제나 결국은 선택의 문제다. 휴 노리스는 자신이 보는 휴 노리스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휴 노리스가 있다. 신이 보는 휴 노리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본연의 휴 노리스가. 하지만, 그건 오직 기록 담당 천사만 쓸 수 있는 이야기다. '
소설 초반부, 노리스가 왜 장애를 입어 휠체어에서 생활하게 되었는지 노리스의 지난 인생을 펼쳐 보여주는 부분에서 내비친 작가의 생각이다.
어쩌면 정말 인간이 나 자신이나 타인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며, 그건 오직 기록 담당 천사나 할 수 있는 일 일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나도 어떤 게 진짜 내 모습일까?
잘은 모르겠으나 무수히 많은 나로 이루어진 '진정한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새로운 일들로 인해 늘 다른 관점으로 변신하며 살아갈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섣불리 누군가를 '잘 안다'라고 생각하며, 내 마음대로 그 누군가를 위해 하는 모든 행동들을 한번쯤은 멈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장미처럼 짧은 한 순간이었지만 그것 자체로도 충분 완전한 인생이었다고 작가는 '이사벨라'를 통해 우리에게 조용히 말하고 있다.
진정 장미의 한 순간과 주목의 한 순간은 같음을
한 치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가능하면 짧은 인생 동안, 언제나 어디서나 완전하고 더할 나위 없이 자기답게 멋지게 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