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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는김작가 Aug 07. 2016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40. <알랭 드 보통>의 ESSSAYS IN LOVE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파스칼의 말이다.
맥없이 사회적 영역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독자적인 능력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 오래전에 자족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다. 나는 내 방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른 인간에게 기초하여 자신의 삶을 구축하는 데서 오는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ㅡp185.  '행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그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된 남자, '나'

주인공 <나>는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브리티시 항공 이코노미 좌석에서, 커다란 녹색 눈과 파란 블라우스 차림에 회색 카디건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녀 <클로이>를 '운명'처럼 만난다. 그녀를 비행기 옆자리에서 만난다는 건, 계산해 보건대 989.727분의 1 확률!


이 수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가는, 두 사람의 만남이 누군가 하늘에서 잡아당기고 있는 '운명'의 줄로 이미 연결되어 있을지도, 미리 정해진 '숙명'이라는 실로 이어져 있었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충분히 불러일으키는 수치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재미난 발상이다.

누군가에게 한눈에 반하는 그 상황에서 나란히 옆자리에  앉을 확률을 계산해보다니…….

생각해보면, 아닌 게 아니라 이 지구 상에서 누군가 내 마음에 쏙 드는 이를 만난다는 것 자체는 참 드물고 어려운 일이긴 하다. 그 우연한 만남을 인연으로 맺어 결혼까지 골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만은 더더욱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끌어오는 것일지도……. 그 단어가 주는 묘한 안도감을 누구든 한 번쯤 느껴보았으리라.



어쨌든,  989.727분의 1 확률인 그녀 클로이! 

주인공 <>의 눈에 지금 현재, 완벽한 '오 마이 비너스'다.





<알랭 드 보통>은 그렇게 나와 비너스의 만남 확률을 제시한 후 '우연과 운명의 상관성'을 곱씹어보게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필연적 운은 과연 우리에게 존재하는?' 

'혹시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 <나>는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의 실체가 혹시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닐까 고민하면서, 우연한 만남의 모든 순간세세히 분석한 단상들을 계속 늘어놓는다. 그러'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는 삶의 우연적 성격을 목적성이라는 베일 뒤로 감춘다.  구원의 연인을 만나는 일이 객관적으로는 우연이고 따라서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늘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두루마리에는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고 주장햐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인생에 있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의미도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일 뿐이며, 두루마리 같은 것은 없으며 [따라서 우리를 기다리는 미리 정해진 숙명은 없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기는 불안ㅡ 간단히 말해서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해 두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을 보장해주지 않았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결국, 심오한 고찰 끝에 '불안'이라는 것이 세상의 연인들에게 '낭만적 운명론'을  안겨다 준 거란다. 작가의 말대로 정말 그렇다면?……. 몹시  씁쓸한 일이다!



어쨌든, 그랬거나 말았거나 첫 눈에 반한 뇌는 또 불가피하게 계속 달콤 쌉싸름한 사랑의 늪으로 그들을 이끈다. 비록 언젠가는 그와 그의 비너스, 클로이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이별의 순간이 올 때까지 말이다.



그(녀)가 나를 바라는 것일까, 바라지 않는 것일까?


주인공인 <나>는 <클로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계속 끊임없이 반문한다. 클로이가 나를 바라는 걸까? 아닐까?

그래서 <나>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낭만적 운명론으로 시작한 모든 구애자들은 결국,  판결을 기다리는 범죄자처럼 떨면서 이 질문을 마주한다고 한다. 그러니 확실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절대 '구애'라는 땅에 들어가 얼쩡거리지 말길 작가는 권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 번쯤은 고민해보았던 것도 같다. 그가 나를 바라는 건가? 아닌가?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곧바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는 사람[우리는 곧 배은망덕해진다]이나 절대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우리는 곧 그 사람을 잊어버린다]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상대의 마음에 안겨줄 줄 아는 사람이다. "



리하여 작가는 사랑의 과정에 '희망과 절망'  적절히 안배할 것, 다시 말해 밀당 요성 간과하지 말길 언급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사랑에 빠진 후에  곧잘 '배은망덕'해지기도 하고, 쉽게 훅 '잊어버리기'도 한다. 가볍기 그지없다. 

상대방에게 호기심을 갖고 몰입하던 시점이 어느정도 지나면 서로 투닥투닥 싸우다 급기야 어느 한 쪽의 눈길은 외부로 향하지 않던. 시간이 흐를수록 진부한 애정 패턴에 태로움을 느끼지 않을 자 그 가 있으리오. 사랑이 변치 않고 영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안 믿는다고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그게 반드시 사람들의 진실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방식일 뿐이거든요."



누군가 내게 사랑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을 할까?

아쉽게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다.



사랑은 무한한 인내력을 요구한다.

사랑하는 를 만날 때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과의 상처받기는 얼마나 쉽던가! 그래서 우리는 늘 적당히만 자신을 내보이는 것 일지도 모른다. 사회 도처에 우리신뢰하지 못할 것들 투성이니 자신도 모르게 적절한 방어자세를 취할 수밖에. 사랑도 예외는 아니리라.


상대방을 위해 무엇인가를 배려하고 무한정 기다리며 지켜봐주기보다는, 무엇이든 자신의 이익과 편리함을 먼저 추구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사랑을 믿을 수도 없고 방어는 필수일 수 밖에…….

그래서 사랑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를 그 아름다운 순수, '순정' 그 자체가 새삼 그립고 또 그립다.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흔히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말한다. 나만의 그(그녀)는 적어도 당사자의 눈에는 얼마나 완벽한 존재이던가! 제삼자가 보았을 때는 극히 허접할지도 모를 그(그녀) 이건만.



알랭 드 보통은 <클로이>에게 그런 절대적 사랑의 상태에 빠져 무한 애정으로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 '나'는 클로이를 향한 뜨거움을 친구들과 공유해 보려 애썼으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플롯은 없고 액션조차도 거의 없는 이야기, 움직임이 거의 없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 보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예리하고 재밌는 표현이다.

주인공 <나>처럼, 누구나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때에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만의 환상이 가미되어 있음을 작가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 정신줄을 붙들어 거듭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작가의 말을 인용자면,

 '그(녀)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말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알랭 드 보통씨, 관찰력과 표현력이 보통이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 누가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 준다.



맞는 말이다.

낭만적 운명론을 거쳐 어려운 밀당에 골머리를 앓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콩깍지에 둘러 싸여 한없이 상대방을 이상화하는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 나가는 성장의 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되겠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보다 더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임을 말이다….



러고보인간은 정말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첫 부분에 언급한 파스칼의 말처럼, 자기 방에 계속 혼자 있을 수도 없어 그 방에서 나와 불행의 한가운데에 계속 서 있게 된다 해도, 누군가가 내게 관심과 격려와 사랑을 가져주기를 끊임없이 갈구하지 않던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 하드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작가의 말대로, 사랑이 없으면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마저 상실할지도 모르니, 참 안쓰러운 존재다.



태초에 모든 인간은 등과 옆구리가 둘에, 손과 다리가 넷, 하나의 머리에 두 얼굴이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자웅동체였다고 한다. 이 자웅동체들은 워낙 막강하고 자존심도 강해서 제우스는 이들을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밖에 없었으며, 그 날부터 모든 남자와 여자는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반쪽과의 결합을 원하게 되었, 참 그럴듯한 환상적인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우리는 늘 그 떨어져 나간 자웅동체의 반쪽을 애타게 찾고 그리워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반쪽을 되찾아 그 온전한 사랑 안에서 자아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자 말이다.

 




이제 책 뒤편에 언급된 사랑의 두 가지 분류를 언급하고 마무리할까 한다.



"미성숙한 사랑의 논리적 절정은 상징적이든 현실적이든 죽음이다. 성숙한 사랑의 절정은 결혼이며, 일상[일요일 신문, 다리미, 리모컨이 달린 장치들]을 통해서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이다."



성숙한 사결혼으로 마무리하고 있어서 조금 놀랍긴 하지만, 이 글을 썼을 때 작가의 나이가 이십 대 후반이라 하니 충분히 그렇게 생각했을 법도 해 그냥 반론 없이 넘어가기로 한다.

사랑의 실패는 우리를 죽음과 같은 그 깊은 절망으로 이끌며, 사랑의 성공은(내 생각엔 성숙이 아니라) 일단 결혼으로 이어지는 게 맞다. 그렇게 결혼으로 이어진 사랑은 일상으로 이어져 정말 하루하루 새로운, 또 다른 차원의 사랑이 펼쳐지게 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사는 방법을 알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사는 것도 자전거 타기나 피아노 연주 하기처럼 하나의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랑에 고통이 없을 수 없다.  늘 지혜로울 수도 없다.

그러니 사랑이 힘들다고, 다른 사람에게 나를 실망시킬 기회를 주기 전에 스스로 실망해버리는 금욕주의적 삶을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사랑의 순간, 혹시나 받을지도 모를 상처가 두려운 나머지 겁쟁이가 되어 지나치게 스스로를 방어하고 진실된 마음을 감추기만 하는 것도 정녕 옳지 않다.



작가의 말대로 사랑은, 사랑의 모순들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해주며, 첫눈에 반하는 어리석음의 불가피성과 조화를 이루게 해 주고, 두려움의 철학이나 실망의 윤리학을 구축하지 말 것을 알려주고, 사랑의 아이러니로부터 절대로 멀리 벗어날 수가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그러니 사랑 앞에서 더 이상 망설일 일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 그 나름의 미학이 충분하다.






어떤 하나의 쉽고 간단한 이론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사랑! 

그 어렵고 난해한 '사랑'을 재치 있는 발상으로 분석해 쓴 '알랭 드 보통'의  Essays in  Love!

이 책은 내게 케케묵은 '사랑'이라는 화두를 신선한 느낌으로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이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대해 답을 내려보고 싶다. 여전 좀 어렵지만…….



"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그렇게 끊임없이 생각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자신을 성숙시키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의의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정신적 고양'의 원동력이자, '가장 강력한 삶의 근원'이 바로 사랑이리라.



'사랑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한 선물이다'는 장 아누이의 말과 '사랑하는 것은 곧 인생이다'라고 말한 괴테가 떠오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낭만적 테러리즘의 한가운데에서 위험하게 허우적댈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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