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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는김작가 Jul 20. 2016

「나는 폭포 소리를 잊어먹었다 하」

#39. 고은 시선집  '마치 잔칫날'에서 폭포를 맞다.





고은



폭포 앞에서

나는 폭포 소리를 잊어먹었다 하



폭포 소리 복판에서

나는 폭포를 잊어먹었다 하



언제 내가 이토록 열심히

혼자인 적이 있었더냐



오늘 폭포 앞에서

몇십 년 만에 나 혼자였다 하







오랜만에 찾아간 제주는 여전 여유롭고 고즈넉한 풍경 그대로였다.

여기저기 돌아볼 곳이 한 두 곳이랴마는, 발길은 그 어느 곳보다 바닷가 어느 언저리 폭포에 머문다.


아.

폭포 앞에서

나도

폭포 소리를 잊어먹었다 하.





뜨거운 땡볕 여름.


열기에 휩싸여 몽롱해진 몸과 마음을 폭포만큼 시원하게 식혀주는 게 또 있을까? 거기 정방폭포는 아득한 예전 기억 그대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세찬 물줄기를 여전히 바다로 뿜어대고 있었고, 도시의 소음에 젖어 폭포 소리를 잊어 먹었던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낙하하는 물줄기에서 튕겨져 나오는 차가운 물방울을 맞으며 정신이 번쩍.

머릿속은 백지가 된다. 그저 떨어지는 폭포 속으로 뛰어들고 싶기도 하고  폭포 소리를 따라 목청껏 소리 지르고 싶기도 하고...


기다란 백색 소음에 젖어 스르륵, 잠시나마 평안함에 깊숙 빠져들어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렇게 어느 바위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앉아서,

마음속 깊은 곳까지 세차게 파고드는 폭포 소리를 벌컥벌컥 들이켜 온 몸을 적시고,

버석거리는 내 영혼도 적시고 또 적시고…….






한참을 그렇게 망연히 앉아 내 모든 근심들과 부질없는 욕망들을 흩어지는 물보라에, 

이어지는 먼 바다에,

모두, 

던져버리고 일어섰다. 



오늘 폭포 앞에서

몇십 년 만에 나 혼자였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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