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원래 질투를 잘 못느껴?"
연애를 할때면 이따금씩 듣는 말이다. 연애마다 내 마음에 담고 있던 애정의 농도가 달랐기에 밖으로 표출되는 감정의 크기 역시 제각각이었지만, 만나는 상대가 누구였든 질투는 일정한 주기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주제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질투라는 감정에 조금 무딘 편이다. 놀라운 사실은 내가 꽤 감성적인 사람이란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감정들에 꽤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지만 유독 질투심만은 쉽게 발동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질투란 사랑하면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감정이라 말한다. 그러나 내게 사랑과 질투 사이의 연결고리는 희미하기만 하다. 그 결과 처음에는 쿨하고 멋진 남자친구라는 칭찬을 받다가 결국 끝에 가서는 사랑없이 연애하는 나쁜놈 혹은 냉혈한이 되어 있다.
질투라는 감정과 멀어진건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막 국민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고모는 새로 이사할 집을 구경시켜준다며 입주 예정이었던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로 나를 데려갔다. 그것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빈부격차를 피부로 느낀 사건이었다. 70평 넘는 공간에 모든 것을 최신식으로 채운 신식 아파트의 모습에 말 그대로 위압되었다. 20평이 조금 안되는 낡은 빌라의 우리집이 오버랩되며 스스로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제어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고 그 불똥은 엄한 부모님에게로 향했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 온갖 심술과 몽니를 부렸다. 그 날 저녁,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채워진 식탁에 앉았지만 평소처럼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 때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에 묻어있는 미안함 그리고 약간의 무기력함이 지금까지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어린 마음에 질투를 하나의 감정이 아닌 죄악처럼 여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계기는
질투를 '철 없음'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모델하우스 사건 이후 질투와 담을 쌓기 시작했고 재밌게도 그 때부터 점잖고 어른스럽다는 칭찬을 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철이 조금 일찍 들기는 했지만 내가 정말 어른스러웠다기보단 감정을 표출하는데 온갖 눈치를 보았단게 정확하지 싶다. 학교에서 그리고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질투는 철 없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바꿔 말해 질투라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보다 그것을 꾹꾹 눌러 담는 것을 미덕으로 보는 분위기는, 나와 질투의 내외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렇게 질투는 내게서 더더욱 멀어져갔다. 다행히 이 후 토이와 윤종신으로 얼룩진(!) 사춘기를 보낸 덕에 감성은 풍부하다 못해 폭발 직전인 사람이 되었지만 질투만큼은 뭉툭하게 남고 말았다.
"오빠는 정말 질투가 없나보다......"
최근 들었던 그 한 마디가 다시 아프게 다가온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저런 변명이라도 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신 질투를 느끼는 당신이 참 부럽다는, 조금은 소시오패스와도 같은 생각을 홀로 삼켰다. 나는 내 안의 질투라는 감정이 후천적으로 사회에 의해 지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나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닐수도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꼬리표를 달아버리고 그것을 통제할 것을 강요한다. 더군다나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인간관계의 마일리지가 쌓이면서 감정을 드러내는게 더 제한 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다보면 내게 감정이란게 남아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의 감정이 잔여물처럼 남는 밤이다.